80년대 말 90년대 초 전대협, 전노협, 전교조 등 맹아

6월항쟁은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6.29선언 발표와 함께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직선제를 건의하면서 수습국면으로 접어든다. 7월9일 국본충북지역본부 주최로 열린 이한열 추모대회는 엄숙성과 함께 승리했다는 자신감, 성과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고민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자리였다.

직선제를 쟁취했음에도 그후 1987년 12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민주운동 진영이 다소 패배감에 젖었고,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야당과의 관계설정 등을 둘러싼 책임 논쟁에 휘말리기도 한다.

   
▲ 도종환                                 ▲김재수                             ▲김형근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항쟁의 결과는 노동운동의 분출과 대중조직 결성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충북민협과 국본 등 6월항쟁을 준비하고 이끌었던 현장 활동가들이 대거 시민사회단체를 만들어 NGO 활동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노동운동사에서 노동자 대투쟁으로 일컬어지는 1987년 7,8월 국면을 통해 청주지역에서도 삼영화학, 성진사, 한음파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에 나서는 등 약 40여개 사업장이 파업 또는 가두시위, 잔업 거부 등에 참여하게 된다.
또 학도호국단 총학생회 체제에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등을 통해 민주적 학생회 건설에 나섰던 대학생들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구성하면서 1990년대 중반까지 전국적인 학생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대학생, 청년, 문화단체 줄줄이 결성
6월항쟁의 결과물로 1987년에 조직된 대중조직은 충북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청주민청 준비위, 충주·중원지역민주청년연합, 민주교육추진충북교사협의회(민교협), 충북문화운동연합, 충북문학운동협의회 등이다. 또 시·군 단위로 자주적 농민조직이 잇따라 만들어졌다.

전대협의 지역조직인 충북대협은 6월항쟁 과정에서 충북대 정·부 총학생회장 당선자 신분으로 참여했던 박영호, 이광희씨 등이 주축이 됐다. 당시 충북대는 2학기부터 총학생회 임기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첫 운동권 총학생회를 구성한 상황이었다.

청주민청 준비위는 연철흠 현 청주시의원, 김성구 전 충북우리밀 대표 등이 중심이 됐다. 훗날 전교조 결성을 이유로 해직되는 도종환 시인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인 민교협 결성 외에도 김창규 목사, 김희식 흥덕문화의집 관장, 박종관 한국문화예술위원, 시인 오맥균, 화가 김기현, 무용가 오세란 등과 함께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의 전신인 충북문화운동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충북문학운동협의회 등에 폭넓게 참여하게 된다.

6월항쟁을 준비했던 충북민협 사무국의 멤버들도 이후 충북지역 노동·시민운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는다. 사무국장 출신인 김재수씨는 민주노총 충북본부 사무처장을 거쳐 노동자 자주관리기업 우진교통 대표를 맡고 있다. 6월항쟁 당시의 사무국장인 김형근씨는 충북연대 등 시민단체 활동 이후 열린우리당 충북도당 사무처장을 거쳐 청주시장 경선출마 등 선출직 당선을 노리고 있다. 변지숙 당시 민협 간사는 충북여성민우회를 만들어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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