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담배 인심 같이 좋은 것이 또 있을까. 담배는 특히 남성들의 기호품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며 정담을 나눴다. 기분이 좋아서, 속이 상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애연가들은 담배 맛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피우던 담배 중에 30% 정도가 청주 연초제조창에서 생산됐다. 1946년 문을 연 청주 제조창은 2003년 마지막 문을 닫을 때까지 수 많은 담배를 생산했다.

▲ 개피담배생산 청주 연초제조창의 전성시대였던 1960년대 1800여명의 종업원들이 반자동식 기계에서 수작업으로 담배 곽에 넣는 작업을 통하여 개피담배를 생산하였다. / 1960년대 초창기는 봉지 담배인 「장수연」을 시작으로 군인 담배인「공작」,「화랑」,「샛별」,「백구」「백양」,「태양」,최초의 필터 담배인「아리랑」그 외에도「장미」,「거북선」 등이 청주에서 생산됐다. 청주 연초제조창의 전성기는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70년대 초반으로 1800여 명의 종업원들이 일터를 얻어 호황기를 이뤘다. 청주 연초제조창이 성업을 이루던 시절, 출퇴근 시간 내덕동 주변은 사람들로 꽤나 번잡했고 시내버스도 만원으로 청주 상권이 내덕동에서 가장 활발했었다. 그 당시 청주의 생산 기업체는 연초제조창과 남한제사, 청주방직, 사기공장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 근무 여건이 좋고 임금이 높은 연초 제조창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당시 청주에 거주하는 젊은 남성들은 연초제조창에서 근무하는 여성과 혼인을 하면 봉을 잡았다고 할 만큼 제조창의 여성들은 인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콧대도 보통 센 것이 아니라 왠만한 남성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 청주 연초제조창 생산 담배들 1946년 살담배인 ‘장수연’과 ‘풍년초’ 개피담배(권력)인 공작. 무궁화 군인 담배 화랑과 샛별이 생산되고 50년대 백구 백합 70년대 새마을 최초의 필터 담배인 아리랑과 환희 그리고 관광기념 담배인 ‘선’이 가늘게 말아 판매됐다.
필자가 우연한 기회를 얻어 친구들과 청주 연초제조창을 견학한 적이 있었다. 작업장에 들어서니 1m 높이의 개피 담배가 곳곳에 쌓여 있었고 여성 근로자들이 능숙한 솜씨로 그것들을 담배 곽에 담는데 속도가 대단했다. 오른손으로 개피 담배를 집어 들고 왼쪽 손의 곽에다 넣는데 20개피를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넣었다. 놀라움에 감탄사를 연발하니까 우리를 보고 여직원들이 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얘, 넌 담배를 많이 피워 키가 작은 것 같으니 어서 담배 끊고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야 제 코 좀 봐라. 사내구실 제대로 하겠는 걸? 구두도 반질반질 얼굴도 반질반질 넌 여자친구 많겠다. 여기저기서 킥킥대며 던지는 진한 농담에 우리는 당황했고 결국 창피함에 뛰쳐나오고 말았다. 안내원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회사에서 견학하는 사람들 오면 입 조심하라고 여러 번 주의를 줘도 워낙 입들이 거칠어 쉽지 않다”며 사과했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1623년 광해군 재위 시절로 일본을 통해 건너온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처음 들어 왔을 때는 회충예방과 고뿔예방,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데 탁월하다고 알려져 남녀노소 함께 피우는 만병통치약으로 애용됐다고 한다. 담배가 처음 재배된 곳은 경상남도였고 점진적으로 전국으로 확산됐는데 울산지역에 담바구 타령 민요가 생겨난 것을 보면 담배의 위력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 청주경제발전의 총아연초제조창한때 1800여명의 종업원들이 수많은 종류의 담배를 생산하여 지역경제에 크게 이바지했던 청주 연초제조창의 모습. 2003년 문을 닫고 5만평 중 2만평을 청주시가 매입, ‘청주첨단문화사업단지’로 활용하고 3만평은 담배인삼공사가 관리하고 있다. 국어사전을 보면 담배의 원산지는 남미의 페루이고 종은 가지과의 담배 속에 속한 한해살이 식물로 60종의 원종과 20종의 변종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담배 잎에는 방향과 자극성, 마비성이 있고 니코틴이 들어 있어 오래 피우면 중독되어 쉽게 끊지 못한다. 담배는 온대성 건조한 기후에 적합한 식물로 우리나라 기후에 알맞고 그 중에서도 충북과 강원도 남부지방에서 질 좋은 황색연초가 많이 재배된다.일제가 강점하면서 1909년 연초세법이 공표되고 명목상 우리 정부가 조사했다는 기록에는 충청북도 담배 경작 면적은 1천 2백 70 정보였고 144,359관(貫)이 생산된 것으로 적혀있다. 재배 기술 발달과 경지가 늘어나 1914년 연초세령이 공표되고 생산된 잎담배를 수매해 서울, 부산, 인천, 대구, 대전, 원산 등지에서 가공해 살담배를 생산했다. ▲ 우량엽연초 갈무리 건조실에서 무연탄을 때서 건조시킨 우량품의 엽연초를 선별하여 수매를 준비하는 농부는 담배농사로 목돈을 마련 자녀들 대학등록금으로 사용했다. /1960년대 음성 원남면
충청북도는 1912년 청주, 괴산, 청안에 연초 조합이 설립됐다. 초창기에는 우리 풍토에 안착된 조선종과 일본종, 터키종들을 재배하다가 품질이 좋은 황색 연초를 확대 재배해 우량품의 잎담배를 일본으로 가져가 권련(개피 담배)으로 가공 생산해 우리나라 전국 판매를 독점했다.

조국 광복 후 일본인들의 담배 생산 공장을 이어받아 본격적인 국산 담배 생산이 시작됐고 1946년 청주 연초 생산 공장이 설립되어「장수연」과 「공작」권련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 즐비하던 건조실 쌀농사와 병행하여 밭농사의 주업을 이루던 1960년대 시골 곳곳에서 볼수 있었던 잎담배 가공 건조실. 지금은 담배농사가 크게 줄고 자연건조를 시키면서 건조실들이 살아져가고 있다. 1970년대 충주가금면 ▲ 잎담배 건조 잎담배(담뱃잎)를 따서 촘촘히 엮어 비닐하우스 속에서 건조시키는 농부. 예전엔 건조실에서 불을 때 말렸지만 요즘은 자연건조가 많아졌다. / 1980년대
전국에서 가장 질 좋은 잎담배가 30%나 생산되는 충북은 농촌에서는 잎담배 재배로 농가 소득을 올렸고 청주에서는 연초제조창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소비가 줄고 제조창 기능이 약화되면서 청주 연초 제조창은 2003년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신탄진에 새로운 연초제조창이 생기고 원주창이 확대되고 최신 기계 설비를 갖춘 새로운 연초 제조창 유치를 놓고 청주와 경북 영주가 경쟁을 했지만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영주로 넘어갔고 청주 연초 제조창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현재 연초제조창 부지는 5만평 중 2만평을 청주시가 매입해 청주 첨단문화 산업단지로 활용하고 3만평은 담배인삼공사가 일부만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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