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전우회 김방일회장, 영화제작사에 시나리오 열람요청
소설〈실미도〉’실미도 북파공작원 생존자 청주교도소에서 만났다’ 주장

20세기 한국현대사의 10대 미스테리사건으로 꼽히고 있는 ‘실미도 특수부대원 난동사건’을 소재로한 영화 ‘실미도’의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강우석감독은 안성기·설경구 등 주연배우 캐스팅을 마쳤고 실미도 현장에 재현시킨 훈련소 세트장에서 촬영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영화제작이 진행되면서 실미도 사건의 ‘처음과 끝’을 꿰고있는 생존자 김방일 실미전우회장(59·청주 거주)의 불안감은 커져가고 있다. 분단한국의 이데올로기적 비극이 자칫 영화의 상업성에 매몰돼 사실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감 때문이다.
실제로 촬영을 시작한 영화제작진은 실미도의 사실고증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훈련교관이었던 김씨를 비롯한 실미도 기간병 전역자 17명이 지난 2000년 결성한 ‘실미전우회’는 영화제작과 관련, 공식적인 협조요청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미전우회 김회장은 “영화제작 계획이 발표된 직후 시나리오 사전열람 요청도 했기 때문에 실미전우회의 실체를 그쪽에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다할 협의요청도 없이 실미도에 세트장을 완공하고 촬영을 하고 있으니 우리 회원들 입장이 불쾌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지난 2월에는 우리 17명 회원 가운데 실미도 사건 충격으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아온 한 회원을 찾아가 돈 100만원을 주고 각서를 받아간 것으로 확인됐다. 도대체 어떤 판단으로 그런 속보이는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항변했다.
영화 ‘실미도’는 지난 99년 출간된 소설〈실미도〉(저자 백동호)를 뼈대로 시나리오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소설을 쓴 백씨는 실미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 교도소에 수감생활 중 전직 실미도 특수부대원을 만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백씨의 소설에 등장한 특수부대원의 이름은 강인찬이며 백씨와 함께 청주교도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면서 실미도 특수부대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전해준 것으로 묘사됐다. 소설내용이 사실이라면 실미도 북파공작원 생존자와 실미도 훈련교관 생존자가 모두 청주에 거주한 셈이다. 확인결과 백동호씨는 실제로 지난 80년말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고 고입 검정고시에도 합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백씨의 소설에는 기간병에게 저항한 훈련대원을 집단폭력으로 처형하는 장면이나 인근 무의도 무장탈주한 훈련대원 3명이 부녀자를 겁탈하고 자살한 사건 등이 세밀하게 기술됐다. 하지만 68년 4월 창설됐다는 의미로 붙여진 ‘684특수교육대’라는 명칭을 ‘683특수부대’로 표기하는등 일부 사실과 다른 오류도 발견됐다. 특히 71년 8월 실미도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서울까지 진입하는 무장난동 사건 당시 살아남은 훈련대원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김회장은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우선 실미도에서 생존한 훈련대원이 있다는 소설구성 자체가 어처구니없다. 당시 사망자에 대한 모든 자료가 일치했고 자폭현장에서 살아남은 4명도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집행을 당했다. 아마도 백씨는 실미도에 근무했던 기간병의 얘기를 전해들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무의초등학교 인질극이나 집단 무장난동 사건은 인근 무의도를 찾아가 주민들을 간접취재한 것으로 짐작된다”
김회장은 훈련대원과 교육기간병을 극단의 적대적 관계로 묘사한 백씨의 소설적 관점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훈련대원을 ‘살인병기’로, 교육기간병을 인명을 함부로 살상하는 ‘악마’처럼 설정한 것은 실미도의 본질을 외면한 ‘상업적 각색’이라는 주장이다. “특수한 목적으로 구성된 부대이기 때문에 초인적인 훈련을 실시한 것은 사실이다. 훈련과정에서 숨진 대원이 3명이었고 무장탈영, 상관폭행 등으로 자살하거나 자체 처형된 대원이 4명이었다. 사실상 북파임무가 실종되고 버려진 부대로 방치되면서 대원들의 동요가 커졌고, 군기문란의 재발방지를 위해 불가피한 방법이었다. 서로가 교육자와 피교육자로 만난 것은 국가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 때문이었다. 훈련대원이나 기간병 모두가 남북간 군사적 대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훈련대원 난동사건으로 숨진 기간병은 12명이며 살아남은 사람 가운데는 충격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리거나 총상 후유증을 앓고있기도 하다. 김회장과 실미전우회원들은 영화 실미도가 기간병과 훈련대원을 자칫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만 몰고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불행한 역사의 똑같은 희생자로써 상처를 보듬지 못하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두 번 상처입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김회장은 “기간병 사망자들은 국립묘지에 안장돼 우리 전우회가 정기적으로 참배하고 있다. 또한 훈련대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를 실미도에 건립하기 위해 별도의 기금을 모으고 있다. 사유지인 실미도 소유권자도 위령비 건립을 위한 부지제공을 약속했다. 영화제작사에 요구하는 것은 실미도의 사실고증과 비극의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 제막에 힘을 함께 하자는 것 뿐이다. 최소한의 상식적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법적조치를 강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미도 특수부대원 생존설 진위는?
자폭 9시간 뒤 인천에 한밤중 무장괴한 출현 보도

실미도 684특수교육대는 68년 1월 서울 한복판까지 침투했던 김신조 일당의 인원과 동일한 31명의 대원으로 창설됐다. 당시 안기부는 김일성 주석궁에 대한 보복 침투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똑같은 인원을 선발한 것. 하지만 훈련도중에 3명이 숨졌고 상관폭행 1명, 무의도 인질사건으로 3명 등 총 7명이 목숨을 잃었다. 따라서 71년 8월 실미도 무장난동 사건때는 24명의 훈련대원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사건 당일 대간첩대책본부에 처음으로 보고된 난동자의 숫자는 21명이었다. 이들이 교관과 기간병 12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 인천에 상륙할 때 해안초소의 근무병이 상부에 보고한 인원한 인원도 21명이었다. 결국 3명은 송도 해안에 상륙하기 전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주장이다. 백동호씨의 소설〈실미도〉에서 극중인물 강인찬을 내세워 설정한 탈출경위는 이렇다. 이날 새벽 기간병을 살해한 훈련대원들은 ‘청와대를 찾아가 구명을 호소하자’고 결의하고 아침식사를 하게된다. 이때 강인찬은 몰래 대열을 이탈해 무의도쪽으로 도주했고 다른 2명의 대원도 무의도에서 합류했다는 것.
생존자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정황은 또 있다. 당시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 난동자들이 자폭하고 난 9시간 뒤인 밤 11시 40분께 인천시 옥련동 박모씨 집에 얼룩무늬 군복차림의 권총을 든 괴한들이 나타나 ‘밥을 달라’고 요구한 사건이 발생해 일간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백씨의 주장대로 청와대행을 거부한 실미도 훈련대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대해 김방일회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사건직후 기간병들이 시신을 모두 확인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초 송도초소 근무병이 24명을 21명으로 잘못 보고한 것이 대간첩대책본부에도 그대로 전달된 것으로 판단된다. 생존자가 있다면 세상이 몇번이나 바뀐 상황에서 30년이 넘게 입을 다물고 있겠는가?”고 반문했다. 또한 훈련대원들의 호적이 사실상 상실된 상황에서 30여년간 신분을 감추고 지낸다는 것이 무리하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생존자가 있더라도 쉽게 자신을 공개하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684특수교육대 입대 이전에 교도소에서 장기수형자 신분으로 있었다면 잔여형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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