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많은 청남대는 22일쯤 일반인에게도 전면 개방된다.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은 이곳의 수려한 풍광과 내부 시설물에만 집중돼 있다. 기대와 환영이 일색인 상황에서 청남대 개방을 그 누구보다도 절절히 느끼고 싶은 이들이 있다. 이른바 ‘물질’이 생업인 어부들이다. 1983년 청남대가 완공되면서 그 앞을 둘러 친 대청호도 사람들로부터 단절됐다. 청남대와 어부들의 질긴 인연은 이 때부터 시작된다.
청남대 주변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입을 열기란 쉽지가 않다. 이들 사이엔 묘한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스스럼없이 얘기하는듯 하다가도 어느 시점에선 함구한다. 그들만의 기밀이 있는 것이다. 이들이 익명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기밀누설(?)에 대한 심적 부담 때문이다. “물론 그 쪽(청남대 경비를 서는 군부대를 의미)에선 부인하겠지만 한 때 우리 어부들은 간첩취급을 받았다. 입어금지 수역에서 고기를 잡다가 붙잡히기라도 하면 해당 사병에게는 포상휴가까지 주어졌다.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부대장의 성격에 따라 달랐다. 청남대 경비를 이유로 물길을 차단시키는 행위는 고기를 잡는 우리에겐 절박한 생존권 문제였다. 그래서 끊임없이 부딪치고 서로 숱한 갈등을 겪었다.” 물속의 지형을 손바닥보듯 훤하게 알고 있다는 이 어부 역시 얘기를 하면서도 간간이 경계하는 눈치였다. “어느 두 집단이 끊임없이 대치하다 보면 그 사이엔 전혀 새로운 기류가 형성된다. 우리들도 그러했다. 서로 앙숙으로 지내면서도 어느 순간엔 동료애마저 느꼈다. 한마디로 미운정고운정이 다 드는 것이다.”

현암사와 청남대의 ‘남다른 사연’
불공드리러 갔다가 신분증 검사받아

청남대 개방으로 덩달아 주목받는 곳이 현암사다. 최근에만도 방송 신문 등의 특집에 자주 등장했다. 현암(縣岩)이란 이름 그대로 멀리서 바라 보면 마치 가파른 구룡산 자락에 사찰이 걸려 있는 듯하다. 20년전 청남대가 들어서자 현암사는 엉뚱하게도 경계의 눈초리를 받는다. 호수를 가로 질러 청남대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현암사에 오르면 앞의 호수와 청남대 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청남대 내부 시설물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시절 현암사는 그나마 청남대의 언저리를 살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특히 사찰 윗쪽의 이 산 정상은 말 그대로 청남대를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포인트’였다. 때문에 한때 등산로가 폐쇄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도내 언론사 사진기자들에겐 이 곳이 필히 찾아야 할 순례(?)의 코스였던 것이다.
이처럼 확 트인 전망 때문에 현암사는 오랫동안 청남대 경비에 있어 요주의 대상이었다. 대통령이 청남대에 뜨게 되면 현암사엔 불자들보다 군인과 경호실직원, 경찰들이 더 북적거렸다. 절을 찾는 이들은 일일이 신분증 검사를 받아야 했고, 사찰에 큰 행사라도 열리면 군 경비병과 청와대 경호실 직원이 아예 상주하기 일쑤였다. 당연히 사찰 정면엔 사진촬영금지 표지판이 내걸렸다. 청남대는 각각 다른 군부대가 3중으로 경비를 맡은 만큼 인근 야산도 수난을 당했다. 상황이 벌어지면 주변의 산이 온통 탐침(探針) 세례를 받았다. 현암사가 위치한 구룡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경직된 분위기는 노태우대통령의 6공 말기까지 이어졌고 전두환정권 때 가장 심했다.
삼국시대 때 세워진 현암사는 원효대사의 전설을 안고 있다. 원효는 현암사 앞에 호수가 생길 거라고 예언한 사람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인도로 유학가던중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크게 깨달은 뒤 이곳 현암사에 들러 2년간 수도를 할 때였다. 원효는 이 일대가 장차 임금이 머무는 나라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언도 했다. 현암사를 지키는 도공 주지스님은 청남대가 들어 선 이듬해인 84년쯤 속리산 법주사에서 이 곳으로 옮겼다. 때문에 청남대와는 뗄래야 뗄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한 때 청주불교방송국 사장을 맡기도 했던 도공스님은 기자의 이런저런 질문에 “이미 여러 언론사에서 다녀 갔고, 더 이상 새로운 얘기도 없다. 과거를 자꾸 헤집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젠 모든 게 원상으로 회복되는만큼 지난 일들은 굴절된 시절의 한 잔상이었다”며 말을 아꼈다. 요즘 현암사를 찾는 관광객들도 부쩍 많아졌다.

비밀 알려고 하지마 “다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배 위에 실렸던 무기가 그만 물에 빠졌다. 수심이 40여m나 되는 깊은 곳이었다. 이를 조용히 처리하려던 경비부대는 인근 어부들한테 구원을 요청했고, 어부들은 한가지 조건을 걸었다. 금지수역에서 고기 좀 잡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무기 인양작업이 이틀만에 성공적으로 끝나자 어부들은 약속대로 편안한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약발은 단 하룻만에 끝났다. 평상심을 되찾은 군부대가 어부들을 다시 쫓아 낸 것이다. 양측간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나타난 적도 있다. 사사건건 간섭받는 것에 화가 치밀대로 치민 한 어부가 회칼을 들고 청남대 입구까지 내달아 군부대를 바짝 긴장시킨 것이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마을에선 무용담으로 전해진다.
입어가 금지되는 수역의 물속엔 어망이 쳐져 있다. 어부들을 의식했다기 보다는 수중 침투가 우려되는 취약지에 대한 구조물인 셈이다. 때문에 오래전부터 이 지역엔 이런 소문이 나돌았다. 금지 구역엔 물고기가 엄청 많을 뿐만 아니라 대청호의 특산물인 쏘가리 역시 몸체가 다른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어부들은 이 말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광범위한 수역이 출입금지 조치됐지만 우리들은 끊임없이 이 사선을 넘었다. 꼭 고기가 많아서라기 보다는 일상적인 작업구역에 해당됐기 때문이다. 쉽게 들어 갈 수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오히려 한번 침투(?)할 때마다 모조리 찍어 냈다.(쏘가리를 잡았다는 뜻).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어부들은 호수의 순찰 시기와 초소근무의 교대시간까지 꿰차고 있었다.” 이렇게 잡은 쏘가리를 종종 상납하기도 했다는 그는 “그러나 모두 오래전의 일”이라며 몇 번이고 말하는 등 아직도 청남대가 안기는 중압감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문의면 지역은 상수원보호구역에 발목이 잡혀 정상적인 어로허가가 불가능하다. 당국은 고육지책으로 유류 엔진을 부착하지 않은 배에 한해 허가를 내줬다. 때문에 문의면 후곡~소전리를 중심으로 작업하는 어로용 배는 배터리 엔진이나 원시적인 ‘노’로 이동할 수 밖에 없다. 반면에 인근 보은군 회남면 어부동을 전진기지로 하는 상대편의 배는 엔진을 달 수 있다. 사실 문의지역 어부들의 가장 큰 소망은 이런 피해의식에서 출발한다. “누구는 엔진 걸고 씽씽 달리는데 우리는 노를 젓고 앉았으니....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에게 청남대 개방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남들처럼 엔진 달린 배타고 고기를 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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