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고율 상계관세 부과 결정 파장 일파만파
국내2위 세계3위 메모리반도체 회사 명성 ‘흔들’

국내 2위, 세계 3위 메모리반도체 생산회사. 충북 최대 수출기업.
충북의 대표적 하이테크 대기업인 ‘하이닉스’ 반도체가 지난 연말에 이뤄진 채권단의 채무재조정 조치로 한 숨 돌리는가 싶더니 미국의 예상치 못한 상계관세 부과 잠정결정이란 돌출 장벽에 부닥쳐 절체절명의 ‘하이 리스크(고위험)’에 빠져들고 있다. 더구나 미국뿐 아니라 EU(유럽연합) 역시 독일 인피니온사의 이의제기로 하이닉스에 대해 최고 30%의 상계관세를 부과하기 위한 사전준비 단계에 돌입, 첩첩산중의 험로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DJ정부 초기 국내 반도체 산업간 ‘빅딜’이란 정책의 산물로 탄생한 하이닉스는 잔존부채와 함께 옛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떠안은 12조원대의 천문학적인 채무로 규모화의 과실을 한 번도 맺어보지 못한채 지난 3년간 생사의 갈림길에서 휘청거려왔다. 하지만 채권단이 지난해 12월 30일 ‘1조9000억원의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출자전환)’한 데 이어 잔존부채 2조원의 대출금 만기를 2006년까지 연장하는 획기적인 채무재조정안을 확정함으로써 모처럼 회생(回生)의 실낱같은 희망을 찾는 듯 했고 실제로 하이닉스는 올해를 흑자전환의 원년으로 선포할 정도로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림자’ 드리운 채권단의 지원
그러나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다고 했나. 하이닉스에게 숨통을 트여준 채권단의 채무재조정 결정, 즉 채권단의 ‘지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채권은행들의 지원을 정부의 보조금 지급으로 확대해석한 미국 상무부(DOC)가 하이닉스 제품의 미국 수출품에 대해 50%가 넘는 살인적 상계관세를 물리기로 지난 1일 ‘잠정결정’함으로써 하이닉스에 대한 그동안의 낙관적 전망을 일순간에 꺾으며 국내 산업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
DOC는 지난 1일 하이닉스 반도체 D램에 대한 한국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사실상 인정, 무려 57.37%에 달하는 고율의 상계관세 부과를 잠정결정했다. DOC의 잠정결정은 잠정결정이 내려진 시점(1일)을 기산일로 해 75일 이내 최종판정이 이뤄지며 이후 45일 이내(한차례에 걸쳐 30일이 연장될 수 있다), 즉 오는 9월 1일(또는 10월 1일)을 전후해 ITC(미국국제무역위원회)의 최종판정이 내려지게 된다.
전례로 볼 때 ITC의 결정은 잠정결정에 비해 관세 부과율이 하향 조정되는 경우가 많지만, 어쨌거나 ITC의 결정은 준사법적 성격-그래서 ITC가 부과하는 관세를 징벌적 관세(punitive duty)라고도 한다-을 갖는 만큼 미국 현지에서 움직일 수 없는 권위를 갖는다.

WTO제소에 한가닥 희망
ITC가 DOC의 결정을 그대로 확정하게 되면 하이닉스의 D램 미국수출가격은 가령 10달러에서 15.37달러나 돼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경쟁회사인 미국의 마이크론 등에 ‘게임’이 되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미국 수출길이 막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정부로선 WTO제소 등 최후의 방어수단이 남겨져 있지만 그 효과는 현 시점에서 미지수다. DOC는 75일 이내 최종판정을 내리기에 앞서 한국정부의 하이닉스에 대한 보조금 지급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한국현지 실사에 나서는 한편 이해당사자를 대상으로 한 청문회도 실시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정부와 하이닉스는 이 기간에 최선을 다해 채권단의 채무재조정이 상업적 판단에서 이뤄진 결정이었음을 집중적으로 호소한다는 계획이다.
어쨌거나 DOC의 잠정결정으로 당장 미국수출품에 대해 상계관세 해당액을 ‘예캄해야 하는 하이닉스는 “DOC의 결정은 실망적이고 사실과 법률에 위배되는 것으로써 우리가 제공한 자료와 정보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내린 일방적인 판단”이라며 “DOC는 채권단의 채무재조정을 한국정부의 보조금 지급으로 동일시했지만 이는 채권단의 자율적이고 상업적인 결정이라는 것이 우리의 확신”이라고 주장했다.

정치권까지 대책촉구 나서
하이닉스 노조는 지난 3일 성명서를 긴급발표, “뼈를 깎는 자구노력으로 조속한 경영정상화에 나서고 있는 우리에 대해 부당한 상계관세를 부과, 하이닉스의 회생을 좌절시키려는 미국의 처사는 제국주의적 만행에 다름 아니다”며 “미국은 9·11 테러시 자국 항공업계에 정부보조금을 지급했으면서 이번에 한국기업을 표적삼아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자가당착적인 부당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청주경실련과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도 이날 “DOC는 잠정결정을 즉각 철회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권은 미국의 부당한 통상압력에 강력히 대처하라”고 촉구했다.
홍재형 의원(새천년민주·청주 상당)과 윤경식의원(한나라·청주 흥덕)을 비롯한 도내 정치인과 이희규·김성조 의원 등 여야 국회의원들은 DOC의 잠정결정이 내려지기 전인 지난 3월20일 하이닉스에 대한 미국 및 유럽연합의 상계관세 조사에 대해 한국정부가 국가경제 차원에서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대처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결의문에 서명한 뒤 국회차원에서의 결의문 채택을 위해 국회사무처에 제출했다.
한때 도내 수출의 60%를 차지했던 하이닉스 반도체는 최근 2∼3년간 계속된 가격 폭락으로 지난해 10억2000만 달러를 수출, 도내 수출비중이 26%로 급락했지만 여전히 지역 최대 수출기업의 위상을 잃지 않고 있다.

○ 만약 LG가 빅딜 주체가 됐다면…
하이닉스의 ‘빈사’상태가 장기화하면서 그동안 항간의 여론은 물론 경제계의 시각을 지배해 온 담론은 “DJ정부의 반도체 빅딜이 실패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 밑바닥에는 “역사에 가정(假定)만큼 부질없는 것은 없다지만 만약 LG가 빅딜주체가 됐다면…”하는 아쉬움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기술력이나 시장지배력 등에서 한차원 높은 평가를 받던 LG반도체 대신 현대전자(당시)를 빅딜의 주체로 결정한 DJ 정부의 판단에 지금도 ‘의문부호’가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즈 같은 해외 언론들은 빅딜추진 당시 “세계 반도체 전문가들 대다수는 LG가 주체가 될 것으로 보고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전자는 말할 것도 없고 LG반도체 출신들인 지금의 하이닉스 직원들조차 이런 역사적 가정을 ‘정말 부질없는 것’으로 단정한다. 얘기는 간단하다.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할 당시 각 회사의 부채는 6조원과 4조원에 달했다. 여기에 현대전자는 2조5000억원을 LG측에 인수대금으로 지급했다. 하이닉스 부채가 12조5000억원에 달한 까닭이다. 채권단이 빅딜의 시너지 효과를 고려, 애시당초 채무재조정을 해주지 않은 한 누가 주체가 됐든 빚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이닉스의 유동성 위기는 과도한 부채에다가 전세계 반도체업계에 휘몰아친 사상 최악의 불황이 양대 원인이 됐다.” 직원들은 “이런 점에서 주체문제의 재론은 큰 의미가 없다”며 “다만 물리적인 통합에만 급급해 빅딜을 강행한 정부의 정책실패에 대한 비판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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