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보훈단체, ‘빨갱이’라고 여전히 반대
괴산군 예산확보 어려워, 도비나 국고지원 필요성 대두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번지(대지 1036평)는 홍범식·홍명희·홍기문의 생가이다. 일완 홍범식은 금산군수로 재직중이던 1910년, 한일합방에 항거하여 자결한 순국지사다. 그의 아들 벽초 홍명희는 그 유명한 ‘임꺽정’의 작가이자 일제시대 최대의 민족운동인 ‘신간회’를 주도했고 민족교육의 상징인 오산학교 교장과 동아일보 편집국장·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리고 손자 홍기문은 저명한 국어학자였다. 3대에 걸쳐 역사에 남을 인물들이 태어난 괴산읍 동부리에는 현재 이들의 생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집은 문공부 발행 ‘문화재대관’에 중요민속자료 146호로 등재됐다 90년 해제된 바 있다. 거기에는 “안채는 좌우대칭의 평면을 갖는 중부지방식의 대표적인 사대부집이다. 전체적으로 전면 5간, 측면 6간인데 형 몸체에 일자형 광채를 한 단 낮게 맞물리는 형상으로 광채의 지붕이 몸채의 아래를 파고 들면서 이어진다. 평면은 몸채에 전퇴를 달고 나머지는 맞배집인데 동쪽 날개만 우퇴를 나중에 덧달아낸 듯 하다”고 쓰여 있다.
1728년 건축되었고 1861년 증축된 것으로 추정된 이 곳에서는 이조판서를 지낸 홍우길(벽초의 증조부), 병조참판을 지낸 홍승목(벽초의 조부)이 기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니까 풍산 홍씨 일가 5대조가 이 집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충북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가옥이며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대로 담고 있어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얘기다.

보훈단체, 벽초에 대한 거부감 여전
현재 벽초생가는 전면 보수작업에 들어갔다. 괴산군은 지난해 9월부터 금년 5월까지 수목제거와 담장보수 작업을 진행중이다. 군은 가옥 매입비 7억2000여만원을 포함해 현재까지 9억원을 투자했으나 나머지는 예산확보가 안돼 내년으로 미룬 상태다. 군에서는 내부수리와 주변토지 매입까지 합쳐 총 공사비 39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현재 이 집의 골격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방·마루 천장과 부엌 등 곳곳이 무너져 내려 보수가 시급한 실정이다. 괴산군에서는 사업비만 있으면 2005년에 모든 공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하지만 사업비 확보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다.
게다가 괴산군의 보훈단체에서는 아직도 벽초에 대한 거부감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벽초가 지난 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가한 이후 북에 남아 부수상까지 지낸 이력 때문이다. 그래서 관련 단체에서는 ‘빨갱이’ 라는 멍에를 씌워 생가 보수작업에도 반대, 괴산군에서조차 쉬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괴산에 거주하는 문학인 김순영씨는 “생가를 매입할 때도 벽초의 아버지인 홍범식 이름으로 했다. 이 집에 살던 이복기씨가 사망하고 비어있던 97년, 지역유지와 일반인 등 70여명이 ‘홍범식·홍명희생가 보전위원회 괴산모임’을 만들어 군에 생가 매입을 요구했는데 그 때 보훈단체와 여러 차례 부딪혔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삼사군학교 출신 모임에서 세운 ‘소설 임꺽정 저자 홍명희 생가’ 라는 표지판도 이들에 의해 철거된 뒤 빛을 보지 못했다고 전해 반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군에서 생가를 매입한 후 모임은 해체됐으나 생가복원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보훈단체에서는 아직도 벽초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뛴다. 군 관계자들도 많이 시달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실제 기자는 생가보전위원회 괴산모임 관계자와 만남을 시도했으나 “보훈단체에서 알면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일종의 ‘레드 콤플렉스’가 아직까지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제월리에는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한편 괴산 제월리에는 현재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지난 98년 10월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공동위원장 신경림·권희돈·강맑실 등)가 모금활동을 벌여 제월대에 건립했다. 글씨는 서예가 신영복씨가 쓰고 문학비 제작은 조각가 송일상씨가 맡았다. 이 비문이 그래도 별 탈 없이 남아 있는 것은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와 보훈단체 대표가 비문을 사전에 합의하는 절차를 거쳤기 때문.
문학비에는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라는 벽초의 글귀가 쓰여 있다. 이것을 제월대에 세운 이유는 평소 벽초가 괴강이 흐르는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 28일 찾아간 제월대는 봄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주변의 얕으막한 산과 산책길이 매우 아름다웠다.
벽초 생가가 복원될 수 있게 되기 까지에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일완 홈범식·벽초 홍명희 생가보전을 위한 모임(공동대표 임찬순·김정기·강태재 등)’의 상임위원이었던 충북대 김승환 교수는 “지난 97년부터 2000년까지 생가가 보전되고 복원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청와대와 국회, 문광부, 충북도, 괴산군 등 관계 요로에 청원을 하고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거대한 시민운동을 벌였다. 그 때 괴산 출신 국회의원, 이원종 지사, 도의회 의원 등 안찾아간 사람이 없었다”며 “김문배 현 군수가 지방선거에 출마했을 때 생가보전을 공약으로 채택할것을 요구했는데 김군수가 당선된 뒤 약속을 지켜 고맙다”고 말했다.

생가보전 위해 애쓴 사람들
벽초 생가는 지난 1919년 이우현씨에게 팔렸다. 그 뒤 이씨의 아들인 이복기씨가 줄곧 이 집을 지켰으나 97년 세상을 떠나면서 보전 요구가 나온 것. 한 때 이 집을 헐고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아 긴장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괴산군에서도 이 집을 사기 위해 이씨의 아들을 2년 동안 찾아다니며 공을 들였다고 했다.
당시 생가보전 모임에서는 이 가옥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건축양식과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문화재라는 점과 홍범식·홍명희의 생가라는 것 외에도 괴산 만세운동의 진원지라는 점을 강조했다. 청원서에서 이들은 “중부지방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던 괴산 만세운동이 이 곳에서 시작됐다. 이 운동은 1919년 3월 19일 괴산 장날 의거하여 4차례에 걸쳐 봉기한 민족독립운동인데, 당시 뜻있는 괴산 지사들이 그 가옥에 모여 봉기를 준비했다”며 이 곳을 역사문화 소공원 또는 근대문학자료관으로 만들어 민족교육 장소로 활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2월 충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벽초생가가 제대로 복원되고 잘 활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도비와 국고지원이 선행돼야 한다는 여론이다. 김승환 교수도 이런 의견에 동조하며 “생가보전 모임을 해체했는데 이제 복원에 관심을 쏟을 계획이다. 별도의 모임을 만들까 생각중”이라고 말했다. 특히 뜻있는 사람들은 벽초생가가 원형 모습을 잃지 않고 복원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옥구조를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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