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슬프다. 2003년 3월 남한이라는 국민국가의 대통령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고 또 참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왜 고심이 없었을까만 이 놀라운 소식은 우리를 낙담에 빠뜨려 버렸다. 명분이 없기 때문에 ‘더러운 전쟁’일 수밖에 없고 패권적이기 때문에 ‘야비한 전쟁’일 수밖에 없다. 명분이 없다는 것은 국제법의 동의를 거치지 못한 침략전쟁이라는 뜻이고 패권적이라는 것은 패권을 확장하기 위한 미국의 이기적인 정벌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야만적 정글 법칙만 남게된다. 힘있는 자는 정의를 만들고 약한 자는 부도덕하게 되는 것이다.
남한의 국군 통수권자는 파병의 명분으로 ‘국익을 위해서’라는 방패를 꺼냈다. 그 말도 맞다. 현재 남한은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만큼 현자(賢者)들이 사는 용감한 동네는 아니다. 자본의 철수와 같은 현란(絢爛)한 전술로부터 압박 외교와 같은 거친 전략을 모조리 구사하는 초강대국의 힘을 남한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한 대표시민 노무현은 고뇌의 시간을 보내면서 참전을 결정했을 것이다. 이해는 한다. 그러나 그런 논리 즉,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패권주의에 동의하는 것은 이 땅에 전쟁을 부르는 죽음의 길일 뿐이다. 그러므로 남한의 대표시민 노무현은 대략 80%의 남한 시민들이 반전평화의 촛불을 가슴에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행히 반전평화 운동으로 국회에서의 파병동의안은 연기되었지만 이것은 남한의 국가정체성을 의심케 만든 곤란한 사건이다. 파병동의안 부결을 희망하는 남한 시민들은 사담 후세인을 지지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반대와 파병반대를 통한 반전평화만이 미래를 기획하는 민족사의 길이며 인간의 고상함을 입증하는 인류사의 전망이기 때문에 파병동의안의 부결을 희망한다. 여기서의 남한 민중은 이른바 제국(Empire)의 대중(multitude)이다. 잔뿌리처럼 사방으로 뻗어있고 생체적으로 작동되며 유목민적으로 사고하는 리좀(rhizome)의 존재가 바로 대중이다. 새로운 시민인 이 대중의 자발적인 저항이 반전운동이라는 거대한 함성을 토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21세기적인 현상 중의 하나다. 물론 전쟁은 꼭 필요한 인류의 제도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최후의 방법이어야 하며 특히 이성을 토대로 하는 근대사회에서는 이성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동시에 국제법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미국은 이 과정을 무시했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만드는 것이며 역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는 자의 기록이라는 야만성을 목도한다. 인간이기에 무척 부끄럽다. 내가 속한 인간이라는 종(種)이 힘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미국 일극(一極) 체제의 패권이 강화되는 이 절박한 인류사의 지점에 서 있으면서 남한의 무력함을 확인하는 이것은 차라리 고문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민족과 인간이라는 이 세 좌표를 묶어주는 꼭지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참전과 같은 거대서사가 남한 시민의 자율로 결정되지 않고 초국가인 미국의 영향으로 결정되려 한다는 이 참절(慘絶)한 사실은 남한의 국가정체성을 완전히 뒤흔드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과연 남한이 완전한 독립국가란 말인가? 이 대목에서 간단하게 남한은 미완의 국민국가(nation-state)이며, 미국의 반식민지 또는 신식민지라고 규정하는 것은 쉽다. 어려운 것은 해법이다. 미제의 용병으로 역사에 치욕을 남긴 베트남 참전 이래로 다시 치욕의 길을 가야 한다는 이것을 우리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현실과 이상이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서 바그다드의 하늘에 유성처럼 날아다닌다. 그렇다면 남한인들은 이것을 모르는가. 아니다. 다 알고 있다. 또 남한의 대표 시민인 노무현씨도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다. 그가 남한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요청에 따라서 참전을 요청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참전한다면 지금 우리가 베트남 참전을 속죄하듯이 머지 않아 이라크 참전을 통탄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이라크인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