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시작되어 광복이후 1960년대 말까지 청주 경제발전에 기여한 기업은 남한제사공장과 청주방직, 청주연초제조창, 한국도자기의 전신인 청주사기공장이다.

남한제사는 누에고치를 사들여 명주실(生絲)을 뽑아 일본 등지에 수출했다. 청주방직은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 광목을 짜던 회사였다. 그리고 연초제조창은 잎담배를 수납 받아 제조해 종이에 말아 ‘개피담배’를 생산했고 사기공장은 고령토 흙으로 그릇을 빚어 생활사기 그릇을 구워내던 회사였다.

▲ 남한제사 청주공장일제 강점기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누에고추를 사들여 명주실을 생산해 일본에 수출, 청주경제에 이바지했던 남한제사공장은 전성기에 여성근로자만도 700명에 이르는 큰 회사였다. /1960년 말 촬영 4개 기업의 공통점은 남자 종업원 보다 여성 근로자가 많았다는 것. 남한제사의 경우 1950년대 300명이던 종업원이 경기가 가장 좋았던 1960년대 후반에는 700명에 육박할 정도로 호황을 맞기도 했다.통계 자료를 보면 1930년대 충북 양잠 농가는 5만 5천 4백여 세대나 됐었고 1969년엔 4만 6천 6백여 세대로 파악됐는데 충북 농가 경제에 양잠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남한제사의 전성기 때는 출퇴근 시간이 되면 청주 서문다리에서 사직동 회사 앞까지 이동하는 젊은 여성들의 행렬이 볼만했다.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누에고치를 삶아 실을 빼고 나서 밖으로 실려 나오는 ‘번데기’를 사기 위해 오전 11시와 오후 5시 하루 두 차례씩 20여대의 리어커 장사꾼들이 몰려와 장사진을 이루던 모습이었다. ▲ 누에고치에서 명주실 뽑아봄, 가을로 1년에 두 번씩 농민들이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면 이를 수매하여 명주실을 뽑던 사직동 남한제사 공장 내 작업모습. /1960년대
▲ 누에에게 뽕잎을 먹이던 육영수 여사 제2회 양잠시범대회가 열린던 청원군 강내면 학천리에서 행사를 마치고 잠종실에 들러 뽕잎을 누에에게 먹이던 생전 육영수 여사의 모습. 고 육영수 여사에 의해 권잠실이 건축되고 한국잠사박물관이 생기는 계기가 됐다./ 1973년 6월 9일 주로 일본으로 수출하던 남한제사의 명주실이 가장 많이 팔렸던 1965년에서 1971년 사이에는 누에고치가 모자라 생산량이 가장 많았던 괴산군 장연면 농촌마을 까지 찾아가 웃돈을 얹어사올 정도로 공급이 만만치 않았다. 누에고치가 많이 생산되던 그 시절 청주에는 남한제사가, 청원군 북일면 오근장에는 청원제사가 있었고 각 시 군마다 제사공장이 있어 명주실을 생산하는 양은 정말로 대단했다.우리나라 전역에서 생산되는 누에고치실을 일본이 전량 수입해 가다가 중국에서 값싼 제품이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우리나라의 잠업 농사는 큰 타격을 입었고 남한제사 또한 어쩔 수 없이 쇠퇴의 길을 걷다가 끝내는 문을 닫고 말았다. 텅 빈 건물과 시설이 방치되다가 1972년 11월 15일 건물을 모두 뜯어 철거하고 청주 서문동에 있던 시외버스터미널을 이곳으로 옮겨 와 ‘청주공용버스터미널’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어 운영됐다. 그리고 제사공장과 뽕밭으로 이용하던 넓은 나머지 공터에는 6층의, 당시로서는 거대한 미호 아파트가 들어섰다. 60년대 말까지는 미호 아파트 뒤쪽에 넓은 뽕밭이 있었고 누에고치 종자를 보관하던 잠종실도 건재했었다. 누에치기는 고대로부터 성행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기록에 의하면 기자가 기자조선을 세울 때 전래되었다고 전하는데 중국에서 들어 온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 누에섶에서 고추따기 짚으로 엮은 누에섶에 누에를 올려 집을 짓게하고 누에고추를 따내는 농촌부녀자들. 누에를 많이 치던 시절 농촌어디서나 볼수 있는 모습이었다./ 1960년대
삼한, 고려시대 모두 나라에서 누에치기를 권장했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친잠례’라 해서 왕이 친히 밭을 갈아 농사의 중요성을 본보기로 보였고 왕비가 고관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뽕잎을 따서 누에에게 먹이는 행사를 치뤘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 태종 11년(1411년)과 세종8년(1426년), 성종7년(1476년), 영조43년(1767년) 등 조선시대 대부분의 시기에 누에를 치는 ‘친잠제’와 죽은 누에에게 제사를 지내는 ‘선삼제’를 올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새마을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1972년 6월 9일 ,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관한 제1회 새마을 양잠시범대회가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에서 개최됐고 제2회 대회는 1973년 6월 5일 , 청원군 강내면 학천리에서 거행돼 육영수 여사가 뽕잎을 따서 누에에게 먹이는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 새마을권잠실 청원군 강내면에 세워진 새마을권잠실은 육영수 여사가 72~73년 권잠행사에 참석하면서 새로 설계됐는데 1974년 장녀 박근혜씨가 참석해 준공식테이프를 끊었다.
이 대회가 계기가 되어 학천리에 권잠실이 건축되고 옆자리에 ‘한국잠사박물관’이 개관되면서 전국에서 누에치기가 가장 성행했던 청주 인근 지역이 누에의 메카로 자리잡게 됐다.

1981년 9월 9일, 전두환 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참석한 친잠 행사를 마지막으로 25년 동안 맥이 끊긴 후 2006년 11월 14일에야 다시금 친잠 행사가 실시됐다. 노무현 대통령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청원군의 잠업진흥원에서 세계누에산물 전시와 함께 25년 만에 친잠 행사가 거행된 것이다.

그동안 한국 잠업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번 친잠 행사로 잠업의 세계화라는 기치가 새로이 다져지는 계기를 마련했고. 대한잠사회 또한 청원군과 힘을 합쳐 ‘세계누에축제’개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 모두 이런 흐름에 발을 맞춰 잠업의 세계화를 이루고 충북이 세계속의 누에의 메카로 자리 잡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