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작가회의 작고문인사업, 오장환 권태응 홍명희 신채호 발굴
문학제 개최 및 생가보전운동과 문학관 건립까지 이어져

해방공간 이 지역의 작가들을 끌어낸 것은 또한 이 지역 문인들이었다. 민족작가회의 충북지회(이하 충북작가회의)는 80년대 중반 해방공간 연구를 시작했다. 그 결과 홍명희, 오장환, 권태응, 신채호 등 오랫동안 잊혀졌던 문인들이 부활했다.

이러한 해방공간에 대한 작가 연구는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를 띄었고,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는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도종환 시인, 김승환 충북대 교수 등이 주축이 돼 발굴및 조명사업에 나섰고, 88년 전면적인 해금조치가 이뤄지면서 불을 지폈다.

   
▲ 해방공간 우리지역의 문인들은 지역 문인들에 의해 부활됐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오장환, 단재 신채호, 벽초 홍명희, 권태응 시인.
김승환 교수는 “문화예술사에 있어 사회주의 작가들에 대한 해금조치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이제는 마음껏 연구, 소지, 논의해도 좋다고 허용했던 것이니까. 그러나 100%가 아닌 80%정도만 해금됐다. 정지용, 김기림, 백석, 이태준, 오장환등은 해금됐지만, 홍명희는 아직까지 해금이 풀리지 않았다.

사실 해금에 대한 뚜렷한 기준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87년부터 민족문학 주체논쟁이 활발히 일어났고, 노동해방문학이 대두됐었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 역사에 묻혀졌던 진보적인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속속 출간되기도 했다.

충북작가회의의 작고 문인 조명사업은 공식적으로는 94년 시작됐다. 이전까지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지 못했고, 몇몇 개인들이 발로 뛰며 자료를 수집했다. 김 교수는 “94년 자료조사를 통해 벽초 홍명희 사진을 어렵게 찾아냈고, 벽초 홍명희 생가복원운동을 시작했다.

권태응의 동시, 동요는 미국에 있는 의사 아들이 권태응 문학제 행사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후에 자료를 보내줬다. 홍명희 사진 한장을 얻기 위해 3년을 공들일 정도로 반공이라는 딱지가 깊게 박혀 있었다. 이렇게 알음알음 유작과 사진자료들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작고문인사업을 통해 묻혀진 작가들은 다시금 세상에 나왔다. 벽초 홍명희의 생가인 동부리 고가 복원사업(추진중), 오장환은 생가복원및 문학관 건립(2006년)과, 단재 신채호 기념관 설립(2003년)됐다. 또한 올해로 홍명희 문학제(13회), 권태응 문학잔치(12회), 오장환문학제(12회), 단재문화예술제전(12회)등 10년이 넘게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김 교수는 “정지용은 이미 ‘향수’가 노래로 불러지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전국적인 조직인 지용회에서 문학제 행사를 초창기부터 벌였다. 단재 신채호는 문인이자, 언론인, 그리고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라는 복합적인 의미가 붙지만 문학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고 설명했다.

도종환 시인, 오장환 시발굴
그리고 지난해에는 도종환 시인이 그동안 발굴한 오장환의 초기 동시를 모아 ‘바다는 누가 울은 눈물인갗를 출간했다. 이책에는 현대어 맞춤법에 맞게 고쳐 쓴 오장환의 동시들과 당시 발표지에 실렸던 시 원문, 삽화 등이 함께 수록됐다. 도 시인은 지난 2월 충남대에서 ‘오장환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충북작가회의는 “2005년에는 권태응의 미발굴 소설을 발굴해 세미나를 열었고, 올해는 소설가 홍구범 선생의 소설을 발굴할 계획이다. 건물을 짓는 것보다 자료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이 사업방향”이라고 밝혔다.

지역신문사 동양일보는 포석 조명희등을 발굴해 조명사업을 펼쳤다. 조명희는 충청북도 진천출생으로 시인·극작갇소설가다. 처음에는 낭만적인 시를 썼으나, 뒷날 연극운동가, 소설가로서 활약했다. 20년대 중반 신경향파 작가로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결성했고, 이때부터 급진적인 경향의 작품을 썼다. 20년대 최초의 문제성을 띤 작가로 평가된다.

동양일보는 해마다 포석 조명희 문학제 및 전국 시낭송 경연대회를 개최한다. 올해로 5회째로 맞는 행사는 10월 13일 진천문화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참가자들이 포석의 시와 자유시를 낭독해 수상자를 뽑는다. 시비는 이미 조명희가 태어난 곳인 수암마을에 세워져 있다.

시인이자 작곡자인 정태준의 아버지 정호승 시인은 1930년대 후반의 중요한 종합 문예지 ‘조선문학’의 발행인이었으며, 농민층의 질곡된 삶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비판적 사실주의 농민시를 써서 민족 삶의 총체적 의미를 탐구한 시인이다. 1939년에는 민족의 아픔과 농민의 고난, 서정을 그린 시집 ‘모밀꽃’을 발간했다.

정태준씨는 최근 40여년 오랜 교직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아버지의 조명사업은 지역문인단체에서 간헐적으로 있었다. 현재는 대전 ‘문학사랑’ 계간지에서 나서서 추진중이다. 2002년 호승시 문학상을 제정했고, 내후년에는 시비건립도 추진중이다. 개인적으로는 인터넷 사이트 jtjpoem.co.kr, momil.pe.kr를 통해 아버지를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음성군, 이무영 문학제 개최
한편 음성군은 94년부터 소설가 이무영에 대한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4월 19일에 열린다. 이무영은 1908년 1월 14일 이곳 음성군 음성읍 석인리 오리골에서 태어났다.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1939년 농촌으로 들어가 <제1과 제1장>부터 <흙의 노예> <산가>와 장편 <향가>를 무영농민문학선집을 냈고, 후에는 국방부 정훈국장 등을 역임했다.

10회를 넘긴 무영제는 추모제, 무영백일제, 무영문학상 시상식 등 문학제 행사와 전시, 풍물 등 지역민을 위한 축제로 이뤄지고 있다. 음성 문인협회 반영호씨는 “이무영 문학비 및 기념비, 흉상과 표증비 등이 세워져 있다”고 말했다. 음성군 관계자는 “2004년 생가터를 매입했고 돌로 구획만 잡아 놓은 상황이다. 아직 문학관 건립 계획은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소설가 이무영의 경우 문학계에서 친일논란이 벌어지는 대표적인 작가다. 김 교수는 “해방공간 작가발굴만큼이나 친일작가의 문학사적 정리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지역의 한 문화예술인은 “모든 지역마다 아무리 연구를 한다고 해도 세익스피어, 괴테같은 문화상품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먼저 문학사적, 예술사적 철저한 검증과 공인이 중요하다. 전국에서도 인류의 보편적인 감성을 자극한 작가들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한 지역문인들

충북지역에서는 이무영뿐만아니라 팔봉 김기진(청원.평론), 김용제(제천)등이 친일문제에 걸려있다. 김승환 교수는 “이무영이 농민소설을 쓰기 위해 농촌에 귀의해 ‘제1과 제1장’을 발표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30년대 중반 당시 일제는 대동아전쟁으로 식량이 부족해 산미증산정책을 내놓았다.

또한 지식인들을 상징적으로 농촌으로 들어가도록 했고, 이러한 일에 앞장 선 사람이 바로 이무영이다. 또한 이무영은 반공정권에서는 해군장군을 역임하면서 권력 중심에 섰다. 문단의 최대 권력자로 군림했지만, 그의 친일행위는 이미 학계에서는 밝혀진지 오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자체가 무조건 지역문인이라고 해서 철저한 검증없이 추모행사를 벌이는 것은 후대에 큰 수치를 가져 올 것”이라고 거듭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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