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헌 충청대 교수

이미 언론에서 사라진지 오래됐지만 처음부터 고건은 대통령후보로 부적격했다. 실제로 그의 지지도가 한창 고공행진을 할 때도 정치를 좀 안다는 사람들은 그 허구(虛構)를 지적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후보로서 갖춰야 할 자질 때문이 아니고 체질(?)이 문제였다.

색깔이 상반되는 역대정권을 두루 거치며 실세와 제2인자를 여러번 꿰찬 것을 보면 분명 행정 혹은 정치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지만, 스스로 권력을 창출하는 데 있어선 가장 원초적인 기본에조차 익숙치 못했다. 바로 투쟁성이다.

권력은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저절로 떨어지는 게 아니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권력을 얻기 위해선 천성적인 투쟁성을 갖춰야 한다. 고건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이러한 체질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한동안 잘 준비된 무대에서 주연의 용꿈을 꾸다가 화려했지만 초라한 단역에 만족하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냉혹한 권력의 속성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할말은 아니지만 권력은 그 본질적 맥락에선 마치 조폭과도 같다. 한가지 얼굴로는 결코 쟁취되지 않는 것도 그렇거니와, 지난한 투쟁과 갈등의 과정을 밟아 얻어지는 것도 그렇다. 미국에서도 백악관은 일반인들에게 ‘비열한 사람들의 집단’ 쯤으로 곧잘 표현된다.

이 역시 권력과 젠틀맨쉽은 결코 어울릴 수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지금 고건의 전철을 밟을 지도 모를 인사가 또 한명 눈에 띈다. 정운찬이다. 여권이나 국민들로부터 기성 정치에 대한 상실감의 반사효과를 톡톡히 누리지만 지금처럼 표정관리하며 선문답만 주고 받다가는 언제든지 팽당할 수 있다.

대권이나 권력의 속성을 입에 올릴 때마다 아주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충북의 표심이 이른바 대선의 캐스팅보트라는, 근래 들어 만들어진 족보없는 명제다. 최근 충북을 찾는 대권후보들도 틈만 나면 무슨 선심쓰듯이 이 말을 입에 올린다.

그들의 말대로 역대 대선에서 충북의 표가 대세를 갈랐다면 지금쯤, 정권의 충북에 대한 대접은 아마 분에 넘쳐도 한참 넘쳤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대접은커녕 역대 정권의 철저한 아웃사이더에 머물렀고, 참여정부에서도 임기말 툭하면 터지는 게 고위급 인사이지만 그 때마다 충북출신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 만큼은 반세기가 넘도록 충북 출신 총리 한번 나오지 않았다는 지역의 고질적 피해의식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여론화된 것처럼 충북에 대한 홀대가 아니라 역대 정권이나 권력의 창출에 있어 과연 충북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먼저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지금 잘 나가는 후보 진영에 충북인들은 넘쳐나지만 그들이 중앙단위의 요직이나 중책을 맡았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투쟁과 쟁취를 속성으로 하는 ‘권력’을 만드는데 있어 주도적으로 역할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 만들어진 권력이 나중에 그 쪽을 어여삐 봐주겠는가. 지금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점을 우려하고 있다.

오는 연말 대선은 그 결과에 따라 국가뿐만 아니라 충북에 실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게 분명한데도 과연 충북이 지금의 정서와 인맥구조로 그 주류를 탈수 있겠느냐는 걱정스런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대선 후보가 내려올 때마다 지역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곧추세우기는 커녕 악착같이 쫓아 다니며 소소한 민원해결을 종용하고, 지난해 지방선거가 끝난후 노심초사의 새 자치단체장이 되레 놀랄정도로 의리없는 아부꾼들이 넘쳐나던 그 악(惡) 근성이 이번 대선에서 또다시 재현된다면 충북은 여전히 권력의 ‘주변인’ 신세를 면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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