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계마을 탐방]충주시 엄정면 가춘리 주동마을의 봄풍경

엄혹한 일제강점기의 시대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생각하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밀밭 길과 누룩냄새 풍기는 남도의 술 익는 마을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마을 이름에 술 ‘주(酒)’자가 들어가기도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충주시 엄정면 가춘리 주동마을의 주동(酒洞)을 직역하면 그대로 ‘술 익는 마을’이다.
충북 도계마을 탐사를 위해 주동마을을 찾아간 2월24일 정오 무렵에도 주동마을 경로당에서는 농한기에만 매주 열리는 동계(洞契)의 일환으로, 술추렴이 한창이었다. 속을 달래주는 순한 북어국밥에 오징어무침, 각종 산채가 전부일 뿐 기름진 안주는 없지만, 예순 살도 청춘인 산골 농부들은 “그래도 삼동(三冬)에 먹고 마시며 비축한 ‘술심(술힘)’으로 1년을 버틴다”며 주거니 받거니 잔을 권한다.

누군가 “동네사람들이 워낙 술을 좋아해서 주동(酒洞)이 됐다”며 너스레를 떨자 다른 사람이 반색을 하며 “물이 맑아 술맛이 좋기에 주동”이라고 바로잡는다. 그러나 향토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근 추평저수지로 물이 들어오는 마을이라 수랫골(水來-)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술옛골로 정리됐다가 다시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주동이 됐다고 한다. 최근에는 수렛골로 불리기도 한다.

이름에서 무릉도원류의 이상향이 느껴지는 ‘미락골’은 주동에서 백운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끝자락에 있다. 미락골 가는 길은 길이가 2~3km에 이르는 좁은 산길이지만 아스팔트 포장이 마을까지 연결됐는데, 길 옆으로 계곡이 흐르고 좌우로 이어지는 다랭이논밭이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렇게 가파르고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깊은 산중을 떠나지 않은 은자(隱者)들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예닐곱 채 되는 민가 가운데, 네 채는 주인이 떠나 허물어진 것처럼, 골짜기 깊숙한 밭도 보습을 만난지 오래된 듯 잡초만 무성히 웃자라있다.

미락골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은데, 난리에도 화를 면해서 ‘면화골(免禍-)’이었다가 충청도 발음 ‘메나골’에서 미락골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들도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화를 입지 않아 면화골이 됐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을 보면 몽고군이 충주성 전투에 패하고 물러난 1231년 ‘1차 침입’에서 마을이름이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혹설에는 누군가의 무덤을 이장할 때 ‘면화골’이라고 쓴 지석이 나왔다고 하는데, 언제, 누구의 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 이재표 기자

‘면화골’ 무색한 남상진 小史
징용-인민군-반공포로-국군…꼬박 14년


미락골에 사는 남상진(79)씨의 청년시절 소사(小史)를 들어보면 난리에도 화를 면한다는 면화골의 내력이 무색할 정도다. 지금은 단 세 채에만 사람이 살지만 남씨의 유년시절만 하더라도 좁은 골짜기에 스무 채가 빼곡히 들어서 토담골이 형성돼 있었다.

남씨가 근대사의 격랑에 휩쓸리기 시작한 것은 15살이 되던 1943년 무렵이었다. 일제가 지원병을 가장해 이땅의 청년들을 제국주의 전쟁터로 내몬 것도 모자라 ‘산업전사’라는 미명 아래 강제 징용을 일삼는 상황에서 어린나이에 함경남도에 있던 흥남비료공장으로 끌려간 것이다. 남씨는 이곳에서 해방된 것도 모르고 일하다가 1945년 10월이 돼서야 고향을 찾아 남행길에 올랐다.

해방 이후의 정국은 좌우이념이 극렬하게 대립하는 상태였다. 고향에 돌아온 남씨는 우익청년조직인 대한청년단원에 편성돼 두 해 동안 목총을 들고 전투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6.25가 터지자마자 미락골에 인민군이 몰아닥쳤고 남씨는 얼떨결에 ‘붉은 완장’을 찼다. 그리고 곧 인민의용군의 일원이 됐다.

일제징용 이어 ‘붉은 완장’을 차다
남씨는 “인민군들로부터 ‘강원도 삼척까지만 가면 부대가 편성된다’는 말을 들었고 낮에는 숨고 밤에만 도보로 이동하다가 나중에는 강릉에 도착해 한국의 해병과 같은 임무를 띠고 해안경비를 섰다”고 회고했다.

당시도 밤이면 UN군의 함포사격이 강릉에 주둔한 인민군 부대를 겨냥했는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UN군이 ‘강릉시내에 새까맣게 몰려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남씨가 속한 부대는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퇴각을 시작했지만 이미 ‘안 가도 죽고 가도 죽는 상황’이었다.

남씨는 “가문 땅에 소나기가 쏟아져 먼지가 날리 듯이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뿔뿔이 흩어졌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본 일이 없는 남씨는 강원도가 어딘지 충청도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린 시절 귀동냥으로 들어본 ‘원주’, ‘제천’ 등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강원도 홍천에 이르렀을 때 다행스럽게도 국군 정보부대 소속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만나 고향을 지척에 둔 제천읍까지 왔고, 하룻밤 묵어갈 집을 소개받아 저녁식사까지 대접받았다. 하지만 정보부대원이 떠나자 상황은 돌변했다. 그 집 아들이 치안대 요원이었고 곧바로 체포돼 인민군 포로가 된 것이다.

남씨는 이튿날 여기저기에서 잡혀온 인민군들과 함께 제천극장에 수용됐다가 화탄을 싣는 기차에 실려 나흘 동안 ‘달리고 멈추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부산역에 도착해 미군에 인계됐다.

“미군들이 우리를 홀딱 벗기고 DDT(농업용·방역용 살충제)를 뿌리더니 속옷도 없이 미군작업복과 단화만 주더라구… 250명씩 한 천막에 구겨넣어서 앉으면 서로 무릎이 닿을 정도였고 화장실에 다녀오면 그나마 앉을 자리가 사라졌어. 한덩이 주먹밥으로 하루를 버티고 바닥에 고인 물을 떠먹어가며 굶주림과 싸웠어…” 남씨의 회고담이다. 남씨는 부산 3부두에서 노역을 하며 겨울을 나고 이듬해 거제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가 1952년 가을 경북 영천에서 석방된다.

인민군 석방되자 국군 되어 죽을 고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뒤였고 어머니는 버선발로 나와 아들을 맞았다. 그러나 죽을 고비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번에는 1953년 1월28일자로 국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날아온 것이다.

거듭되는 생이별에 기막혀하는 어머니를 뒤로 한 채 훈련소에 입대해 기본훈련을 받은 남씨는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훗날 베트남전 사령관으로 이름을 날린 채명신 장군이 연대장(대령)으로 있던 20사단 60연대에 배치된다. 강원도 양구지역 북방에 주둔해 있던 60연대는 1953년 3월 채명신 장군이 연대장으로 부임하기 직전 M1고지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대패해 사실상 부대가 와해된 상태였다.

남씨는 이 부대에서 매일 같이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치렀다. 진격과 후퇴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전사자나 부상자가 속출했고, 이에 따라 부대편성이 새롭게 이뤄졌지만 남씨는 천운을 타고난 듯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 탓(?)에 남씨의 군대생활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돼 1957년 국군 입대 만 4년만에야 군복을 벗을 수 있었다.

전쟁 중에 무더기 입대가 이뤄진 탓에 남씨는 일등병으로만 28개월을 보낸 뒤 고향사람을 상급자로 만나 가까스로 이등중사(지금의 병장) 계급장을 달았다. 그래도 말년 9개월 동안 선임하사를 맡았다는 것이 남씨에게 있어 자랑거리라면 자랑거리다.

일본의 강제징용까지 합쳐 청년시절의 꽃다운 14년을 ‘세 나라 군대’에서 보낸 남씨는 자신의 인생 소사를 날짜까지 기억하며 줄줄 꿰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만큼 뇌리에 각인된 것일 수도 있다.

남씨는 이처럼 고난의 개인사를 살아온 것에 대한 보답으로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월 7만원의 ‘6.25 참전수당’을 받고 있다.

남씨는 취재진에게 “차라리 국군으로 싸우다가 다치거나 죽었으면 유족들이라도 편하게 살았을 텐데 그런 복도 없다”며 “가난하던 시절에는 모두가 힘들어 그랬다지만 이제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도 나라에서 신경 좀 써야하지 않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 이재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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