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과거사진상규명위 ‘명칭·강령·규약 신빙성 없다 ’발표
관련자 20명 명예회복, 재심·국가상대 손배소 등 대응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1991년 6월 청주대학교 운동권 학생들을 ‘자주대오’라는 반국가지하단체를 조직, 체제전복을 꾀했다며 20여명을 사법처리한 사건과 관련, 사실상 용공조작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충북지역에서도 과거 군사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해 조직적으로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했음이 증명된 것이다.

20명에 이르는 사건 연루자들의 명예회복은 물론 이후 재심과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 등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자주대오는 도내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구속자를 양산한 공안사건으로 당시 수사기관의 언론발표 직후부터 조작의혹이 제기됐으며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대표적인 의혹사건이었다.

최근 정부의 과거사 규명 의지에 맞춰 꾸준히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으며 경찰청의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에 올라 2004년 재조사가 시작됐다.

▲ 청주대 자주대오 사건을 보도한 지역신문. 경찰은 기무사의 조사결과를 넘겨 받아 16명의 학생들을 추가로 입건한 뒤 기자회견을 통해 암호해독문 등을 증거물로 제시, 사건을 과대 포장했다는 의혹을 샀다. 40여일간 면회 차단, ‘불러주는 대로 받아 써’ 1991년은 그해 4월 명지대 학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붙잡혀 집단 구타당한 뒤 숨진 사건을 시작으로 노동자, 학생 등 10여명의 분신이 이어지면서 3당 합당으로 정권 재창출을 꾀하려는 노태우정부에 대한 반발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위기에 봉착한 정권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고 당시 분신한 전민련 간부 김기설씨의 유서를 동료인 강기훈씨가 대필했다며 구속한데 이어 서강대 총장 박 홍신부의 ‘죽음을 선동하는 세력이 있다’는 발언 등을 기화로 이념공세를 퍼붓고 있었다.자주대오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한을 추종하는 운동권의 구체적인 실체로 조작됐으며 사건이 만들어지는 동안 당사자들 조차도 모르게 치밀하고 은밀하게 그림이 그려졌다.이는 사건 수사를 경찰이나 검찰, 국가정보원(당시 국가안전기획부)이 아닌 국군기무사령부에서 착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민간인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된 기무사가 현역병으로 갓 입대한 신병을 불러 조사기간은 물론 법원에 기소될때 까지 40여일이나 면회를 차단한 채 사건을 만들었던 것.최초로 기무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던 송재봉씨(41·청주대 정치외교·현 충북참여연대 사무처장)는 “기무사령부 수사관들로부터 군기가 빠졌다며 주먹과 발로 수십회 구타와 협박을 당했다. 10여일 동안 잠을 못자 혼미한 상태에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불러주는 대로 자술서를 썼다. 잠깐 잠을 잘때도 양손을 깍지 끼워 가슴에 나란히 올려놓은 상태로 재우는 가혹행위를 당했고 그 자세가 흐트러지면 어김없이 무수한 구타로 이어졌다”고 말했다.송씨는 또 “구속기한 10일을 연장해 20일 동안 기무사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기소된 뒤에야 가족 면회가 허용돼 40여일간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갇혀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송씨의 허위 자술서는 모두 6쪽 분량으로 명칭, 강령과 규약(조직원 생활수칙) 등이 기재돼 있으며 이는 자주대오 사건의 결정적 증거로 활용됐다. ▲ 송재봉씨가 기무사 조사에서 구타와 가혹행위를 이기지 못하고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수사관들이 불러주는 대로 썼다는 6쪽 분량의 친필 자술서. 이는 자주대오가 조작되는 결정적인 증거자료로 활용됐다.

자주대오라는 명칭 기무사가 만들어줘

기무사는 송씨의 허위자술서를 바탕으로 역시 군복무중이었던 추병국(전자공학 85학번), 권영환·정준태(지역개발 86학번), 고원준(법학 86학번)씨 등을 차례로 불러들였으며 이들은 구타와 불면에 시달리며 송씨의 자술서 내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수시로 뺌을 맞고 옷을 다 벗은채로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샤워는 물론 대소변도 조사실에서 수사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리하는 수모도 당했다.

실제 조직의 이름도 초기 수사단계에서는 ‘조직’ ‘강철대오’ 등으로 사용되다가 자술서를 작성하면서 ‘자주대오’라는 정식 명칭이 탄생했으며 강령이나 규약도 수사관들이 불러주는 대로 작성했다는 게 송씨와 이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밑그림이 만들어진 ‘자주대오’는 기무사의 조사를 거쳐 민간인들에까지 확대됐는데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16명의 학생을 연행해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지하조직으로 완성했다.

이들에게 적용된 법률은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 고무 등) 3항과 5항으로 반국가단체 또는 이적단체 구성원과 지령을 받은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하거나 동조하는 자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과거 민주화운동세력을 용공으로 모는데 가장 많이 활용됐으며 이후 국가보안법 철폐 논의의 주요 사례가 돼 왔다.

용공조작 의혹은 법원이 판결한 형량에서도 나타난다. 조직의 총책으로 발표된 송재봉씨가 징역 1년6월, 중앙위원 백상진씨(신문방송 86학번, 이시종 국회의원 보좌관)와 원종문씨(신문방송 86학번)가 각각 징역 1년과 8월에 그치는 등 수사발표에 비해 초라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수사 초기 총책으로 지목됐다가 경상대학책으로 내려앉은 이후삼씨와 박근태(산업공학 87학번)가 각각 징역 2년6월로 상대적으로 무거운 형을 받아 조직 자체가 거짓이라는 점을 시사하기도 했다.

   
▲ 1991년은 3당 합당으로 정권 재창출을 꾀하려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자주대오라는 조작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진은 당시 청주대 학생들의 집회모습.

수사발표 곳곳서 조작 ‘헛젼
자주대오 사건은 발표 직후부터 조작이라는 의혹을 샀다.
우선 명칭이 ‘강철대오’와 ‘자주대오’를 오갔고 강령과 규약 또한 기무사가 송씨를 조사하기 전에 작성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경찰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도 중간조사 발표문에서 “기무사에서 송씨를 수사 중 수사관의 지시에 따라 기억을 더듬어 작성한 강령·규약이 있고 그 강령·규약에 ‘자주대오’라는 명칭이 사용됐을 뿐이다. 기무사에서 송씨를 수사하기 전이나 경찰에서 관련자들을 수사하기 전에 서류로 작성된 자주대오라는 명칭·강령·규약이 발견되거나 압수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또 “송씨가 자필로 작성한 강령·규약 및 이를 근거로 경찰에서 수사한 점은 신빙성이 없다”고 못박았다.
진상규명위의 발표 외에도 자주대오가 조작이라는 사실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명칭이 그랬고 당초 총책, 중앙위원, 등 조직내 직책이 수시로 뒤바뀐 것. 조사과정에서는 총책을 이후삼씨(회계 87학번, 현 이화영 국회의원 보좌관)로 발표했다가 경상대학 조직책으로 정정한 것이나 다른 중앙위원과 단과대 조직책들도 여러번 이름이 뒤바뀌기도 했다.

특히 경찰이 발표한 암호해독문의 경우는 실소를 자아내게 할 지경이었다.
경찰은 기자회견을 열면서 압수한 디스켓과 암호해독문을 제시했는데 디스켓에는 학생회와 관련된 문건이 고작이었고 암호해독문 또한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이 암호해독문은 작성자로 지목된 최영환씨(신문방송 87학먼)가 여자친구와 당시 유행하던 ‘빙고게임’과 편지를 재미있게 주고 받기 위해 한글 자음은 알파벳으로, 모음은 아라비아 숫자 0~9번으로 표시, 조합해 작성한 껌종이에 불과했던 것.
당시 가까스로 연행을 피해 수배가 내려졌던 최씨 스스로도 웃음을 터뜨렸다는 후일담은 사건 연루자들 사이에선 곧잘 술안주에 오리기도 한다.

경찰 진상규명위도 “일반적으로 간첩들이나 사용하는 암호해독문, 지하비밀조직 등의 용어를 사용, 발표함으로서 사건이 과대해석될 여지를 제공했고 관련자와 그 가족들의 인권침해 여지도 충분하다”고 밝혔다.

이들은 경찰 진상규명위의 조사결과에 따라 재심청구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대책을 강구할 계획이다.
한 관계자는 “돈을 바라고 학생운동 한 것이 아닌 만큼 손배소의 경우 이견이 있을수 있다. 재심청구는 보다 확실하게 조작사건을 규명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조만간 관계자들의 모임을 갖고 대응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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