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생, 어린이 노래운동의 선구자

정순철, 이 이름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그러나 이 땅에 태어나 사는 사람 중에 정순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엄마 앞에서 짝자꿍 / 아빠 앞에서 짝자꿍...” 어려서 <짝자꿍>이란 노래를 부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노래를 만든 이가 정순철이다. <새나라의 어린이>, <갈잎피리>, <형제별>, 이런 노래들도 널리 알려진 정순철의 노래일 뿐만 아니라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졸업식장에서 울면서 부르던 <졸업식노래> 역시 정순철이 작곡한 노래다.

정순철은 1901년 충북 옥천 청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최윤은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딸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최시형은 쫓겨 다녀야 했고, 부인 김씨와 딸 최윤 역시 몸을 피해 다니다 붙잡혀 옥천 관아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다행히 옥천군수가 아전인 정주현에게 최윤을 데려가 살라고 내 주었고, 정순철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청산에서 자라며 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을 정순철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도 행복스럽지 못하든 어린 시절! 그리도 즐겁지 않던 어린 시절!....낮이나 밤이나 나 홀로 외로웠습니다.....어머니 아버지의 부드러운 웃음, 재미스러운 말소리가 어찌도 그리웠는지 모르든 그 시절이었습니다.”

방정환과 색동회 창립주역
보통학교를 다니던 정순철은 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나와 옥천역에서 화물차를 몰래 숨어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정순철은 천도교인인 친척집에 머물러 있다가 천도교 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의 배려로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외할아버지 최시형의 세 번째 부인이 손병희의 누이 동생이라는 인연이 있었다. 거기서 정순철은 손병희의 셋째 사위인 방정환과 절친하게 지내며 ‘천도교소년회’에 입회하여 늘 같이 활동을 했다. 그리고 방정환과 같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동경음악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3년 방정환의 주도로 진장섭, 손진태, 고한승, 정병기 등과 함께 ‘색동회’를 만들었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었던 방정환과 함께 이들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여 기념식을 하고 어린이 문화운동과 어린이 인권운동을 시작하였다. 사람의 마음속에 하느님이 모셔져 있다면 어린이 마음속에도 하느님이 있다는 생각, 사인여천(事人如天)하고 경인(敬人)하는 생각은 어린이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어린이 문화운동은 어린이를 비로소 인격적 존재로 대하기 시작하는 운동이면서 생명운동이요 구국운동이었다.

이들은 《어린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어린이들이 읽을 작품을 쓰고 소개하기 시작했는데, 정순철은 이 잡지에 어린이들이 부를 창작동요를 작곡하여 발표,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동요 <우리아기 행진곡>은 나중에 <짝자꿍>으로 바뀌어 경성중앙방송국 전파를 타고 라디오에서 방송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따라 부를 만큼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방송국에는 재방송 요청이 들어오고 유치원과 소학교의 학예회와 나들이 놀이에서 이 곡에 맞추어 유희하는 것이 대유행이었다고 한다. 1929년 그는 정순철동요작곡집 제 1집 『갈닢피리』를 출간했다. 이 작곡집에는 <짝자꿍>을 비롯해 <까치야>, <길 잃은 까마귀>, <여름비>, <봄>, <나뭇잎배>, <늙은 잠자리>, <물새>, <헌 모자>, <갈잎피리> 등이 수록되어 있다.

노래를 통한 ‘색동회’의 어린이 운동에 합류한 인물 중에 윤극영이 있다. 1924년 그가 작곡한 <반달> 역시 어린이 노래를 넘어 누구나 부르는 보편적인 노래가 되어 있었다. <반달>의 윤극영, <짝자꿍>의 정순철, <오빠생각>의 박태준, <봉선화>의 홍난파 이들은 1920년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요작곡가였다. 1928년 1월 19일 조선일보에 발표된 <자장가>도 그가 작곡한 것이며, 동덕역고에 재직하면서 1932년에 펴낸 동요집 『참새의 노렌에도 <참새> 등 19곡이 수록되어 있다.
정순철은 1930년대 초에 색동회 회원인 정인섭, 이헌구와 함께 ‘녹양회’(綠陽會)라는 동요 동극단체를 만들어 ‘색동저고리’, ‘백설희’, ‘에밀레종’, ‘허수아비’ 등의 동극을 발표했다.
정인섭이 각본을 쓰고 정순철이 작곡과 노래지도를 하고 이헌구가 동극을 지도하였다. 이들과 함께 <새야새야파랑새야>의 김성태, <누가누가 잠자나>의 박태현에 이르기까지 많은 동요들이 채보되고 작곡되어 불리어지자 총독부가 제동을 걸기 시작했고 1938년에는 아예 ‘어린이날’ 행사를 전면 중단시켜버렸다.

정순철은 1939년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3년 동안 음악공부를 하고 귀국하여 1942년부터 중앙보육학교(중앙대학교 전신) 음악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는 훌륭한 음악교사이기도 했다. 그는 <옛이야기>라는 노래에 대해 쓴 글에서 “그 노래의 내용(내적생명) 모든 문제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기의 목소리만 아름답게 내고자 한다면 그 노래는 생명을 잊어버린 노래가 되고 마는 동시에 생명 없는 노래를 하는 성악가도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명석한 머리, 풍부한 지식, 예민한 감정과 감각 그리고 열렬한 열정과 통찰력”을 가지고 “노래의 온 생명을 다시 재현시키는”노래를 하라고 가르쳤다.

한국전쟁 납북, 북 행적 묻혀
학교에 재직할 때 그의 별명은 ‘한국의 베토벤’, ‘면도칼’이었다고 한다. ‘면도칼’은 대쪽 같은 성품과 불의를 보고는 못 참는 불같은 성격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성신여고에 있었는데 이숙종교장이 피난을 가면서 정순철에게 학교를 부탁해서 학교에 남아 있었다. 장남 정문화(1926년생)옹은 아버지가 집에 와서 “학교를 인수하러 온 인민군이 제자이더라.”는 말을 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9.28수복 이후 인민군이 후퇴할 때 납북 되었고 그 뒤의 종적은 알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가족들은 정순철이 끌려간 날인 9월 29일을 제삿날로 삼고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왔다. 전쟁과 분단의 비극이 아니었다면 그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작곡가로 우리 곁에 있었을 것이다. <졸업식노래>의 작곡가 정순철, 어린이운동의 선구자 정순철, 비극적 운명의 작곡가 정순철을 우리 고장에 사는 많은 이들부터 다시 기억하고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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