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피살자·납북자 명부 월간조선 발굴보도
전국 피살 6만명·납북 8만3000명, 정부공식 문서밝혀져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 인적사항이 정부의 공식기록인 ‘6·25사변 피살자 명부’를 통해 공개됐다.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52년 3월 작성한 피살자 명부에 따르면 전국적인 피살자는 총 5만9994명이며 충북은 665명의 명단이 확인됐다. 또한 ‘피납치자 명부’에 따르면 전국에서 8만2959명이 납북됐고 이 가운데 8277명이 충북출신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자료는 월간조선이 지난해 2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견했고 올 2월호에 특집기사로 다뤘다. 명단자료에는 나이, 주소, 피살장소까지 명기한 정부자료라는 점에서 상당히 근거있는 자료로 판단된다. 민간인 학살자 명단을 분석해 월간조선 2월호에 기고한 김광동박사(나라정책연구원장·정치학)의 글을 발췌해 정리해 본다.

민간인 학살은 정규군인 북한 인민군에 의한 것보다는 남한 점령지역을 접수, 통제하기 위해 북한에서 파견된 내무성 정치보위국과 점령지역에 설치된 내무서 등에서 주도했다. 북한은 경기도 지역에선 50년 7월말부터, 충청과 전라지역에선 8월부터 본격적으로 각 군·면별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점령지 행정을 본격화했다.
당시 조선노동당이 규정한 ‘처단’의 대상은 민족반역자, 친미 및 친일분자로 되어있다. 내무성의 지시문서상에는 이들 반혁명세력을 국회의원, 각료, 도지사 및 경찰서장, 판·검사, 우익단체 책임자, 악질경찰, 미국 및 일본을 경제적으로 적극 원조한 자 등으로 명기하고 있다. 하지만 ‘선별적 처단’이라는 지침에도 불구하고 ‘악질’ ‘책임자’ ‘적극 원조한 자’ 등의 기준은 무차별적인 학살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었다. 일례로 친일파 처벌을 위해 만든 반민특위 검찰관을 지냈고 김구주석의 판공실장을 지낸 신현상씨가 대전형무소에서 피살당하기도 했다.
민간인 학살의 최대 피해지역은 호남지역으로 전체 피살자의 83%가 전남북에 몰려있다. 이는 당시 강원, 경상, 충북 등의 지역에서는 북으로 갈 수 있는 후퇴로가 확보된 반면 서부지역인 충남, 전북, 전남지역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후퇴로가 확보되지 않아 보복을 받을 지 모른다는 심리적 공포감이 대규모 무차별학살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선별적 학살이 무차별학살로 전환된 것은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서울수복을 전후하면서 부터이다. 일본인 하기와라 료가 쓴 ‘한국전쟁’은 인천상륙, 서울수복 이후 북한 공산주의의 패닉(panic) 상태와 집단처형에 대한 내부자료를 잘 보여준다. 이 책에는 빨치산 투쟁을 중심으로 조직활동을 재구축하라는 것과 반동을 숙청할 계획이 나와있다. 이에 의하면 “침범되었거나 침범되고 있는 지역의 반동에 대한 숙청은 빨치산이 집행한다”고 되어 있고 경기도 지역별 처형대상 수가 기록되어 있다.
실제 선별적 학살이 이뤄진 경기·충청지역 대상자를 보면 대부분 공무원, 군인, 경찰 및 우익단체 책임자나 회원이었다. 충북 청원군 북일면의 기록에 나타난 ‘체포대상자 수집표’에 따르면 총 62명의 대상자는 판사 1명, 전현직 군인 20명, 전현직 경찰 13명, 전현직 공무원 5명 등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농업 내지 상업, 노동자였다. 공직과 관련되지 않은 상당수는 우익단체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충북 괴산군의 경우 총 44명의 희생자 중 18명이 불정면 주민이었으며 그 중에는 공무원 혹은 경찰과 관련된 사람이 많았다는 것. 주민 강중희씨(75)는 “공무원, 경찰같은 사람들이 산이나 남쪽을 피했다가 몇 달이 지나서 이젠 괜찮겠지 하고 밤에 처자식 보기위해 집에 찾아왔다가 붙잡혀 죽은 경우가 많았다”고 증언했다.
충주의 경우 전체 피살자는 126명이었고 학생 및 농업 종사자 6명을 제외한 전원이 공무원이거나 우익단체 가입자 또는 활동자엿다. 대한청년단원이나 부인회 회원, 교사, 면장과 면서기 등이 주된 학살대상이었다. 충북 제천도 마찬가지로 전체 피살자 94명 중 경찰, 철도공무원, 대한청년단 단원, 공무원이 68명을 차지했다.
납북자들의 직업별 분류를 보면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경찰, 공무원, 군인, 변호사, 검찰 간부, 국회의원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분석된 자료에 의하면 8만1731명의 납북자 가운데 1524명의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납북인사 가운데 약 40%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집중됐고 강원도가 인구 수에 비해 납북자 비율이 높았다. 또한 납북 외국인도 20명으로 성직자들이 다수 포함됐다.

● 청주의 우익학살 사례
대성동 당산·무심천 고수부지 학살현장, 교도소엔 방화

청주에서도 내무서의 하부조직인 자위대 소속 좌익들이 이른바 ‘반동 숙청’의 밀고자가 돼 보복적 폭력을 행사했다. 대표적인 우익학살 현장은 대성동 배수지터(일명 당산)과 무심천 고수부지, 옛 청주교도소 자리다. 한국전쟁 당시 충청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송경호씨(작고)는 중환으로 피난을 가지못한 부친 때문에 비밀리에 청주 남문로 집을 왕래하다가 결국 치안대의 감시망에 걸려들어 청주경찰서로 연행됐다. 당시 수감된 사람은 200여명으로 부호, 관료, 우익단체원 등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5일간에 걸쳐 조사를 받았고 송씨는 “반동 논조로 인민을 호도하고 미국을 찬양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마지막 날 인민군은 ‘안전하게 피신시켜 주겠다’며 수감자들을 둘로 나눠 한쪽을 무심천 고수부지로 나머지는 대성동 배수지터로 향했다. 송씨는 대성동으로 끌려갔고 몇 명씩 한데 묶여 당산을 올라가다 뒤쪽에서 따발총 세례를 받았으나 용케 총탄을 피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곳에는 세광고교 학생들이 세운 반공유적비가 세워져있다. 또다른 학살현장인 무심천 고수부지에도 85년 위령비가 건립됐다. 50여명이 총살당했고 일부는 가족이 시신을 거뒀으나 더러는 무심천변에 그대로 매장했다.
한편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발생한 청주교도소 화재사건의 피해가 컸다. 당시 천우신조로 빠져나온 이모씨(작고)는 지난 94년 충청리뷰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내가 남동 22방에 갇혀 있느데 한밤중에 21방까지 차례차례 문을 열고 사람을 끌어냈어. 그러다 잠깐 중단되더니 ‘불이야’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구. 아이쿠 이놈들이 우리는 불태워 죽이려는 모양이구나 싶어서 방안사람들이 사색이 됐지” 그때 누군가 감방내 ‘뺑끼통(오물통)’으로 출입문 아래쪽 환기구를 때려 가까스로 한사람 빠져나갈만한 창살구멍을 만들었다. “불나기전에 끌려간 사람들은 당산에서 총살시켰는데 한 200명 될라나. 교도소에 불타 죽은 사람도 많구” 당시 중학교 교사였던 이씨는 반감을 품고 있던 좌익계 퇴학생의 밀고에 의해 ‘반동·악질교사’로 수감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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