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은 좋다만 효험은…” 기대반 우려반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22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취임 후 한두 달 안에 청와대와 정부 각 부처의 가판(조간신문 발행일자 하루 전날 저녁 발행되는 초판) 구독을 전부 금지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언론은 언론의 길을, 정치는 정치의 길을 간다”는 노 당선자의 평소 지론이 표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가판신문이 폐지되지 않고 일선 홍보담당자들의 마인드가 바뀌지 않는 한 효과가 반감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신문업계에서는 중앙일보가 2001년 10월15일자부터 가판을 폐지했지만, 다른 신문들이 호응하지 않아 홍보 담당자들이 느끼는 업무 부담은 크게 줄지 않은 상태이다.

가판폐단 대체로 공감
한국언론학보 겨울호에 실린 언론학자 이종혁(미국 아이오와대 저널리즘스쿨 객원연구원)씨의 논문에 따르면, 정부기관 공보실 및 기업 홍보실 담당자들은 가판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모니터해 △내용 삭제 △내용 수정 △멘트 삽입 △오보 정정 △기사 들어내기 △익명 처리하기 △기사 교체 △제목 수정 등 8가지 유형의 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계에서는 ‘청와대 가판구독 금지’ 그 자체보다 “기사 빼달라는 향응 제공을 하지 않겠다”는 노 당선자의 발언에 더 큰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김주언 한국언론재단 이사는 23일 “정부부처 등에서 가판신문을 보고 불리한 기사를 빼고 넣으라는 압력을 넣는 등 폐해는 다 알지 않나? 확인되지 않은 얘기를 마구 써대는 신문도 문제지만, 기자에게 ‘로비’ 전화를 걸어 기자가 마치 대단한 위상을 가지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 정부부처의 관행에도 문제가 많았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가판 신문을 보고 정부에서 이래라저래라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바람직한 생각이라고 본다. 신문도 보다 책임 있는 기사를 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속보성 무시한 제동”
지난달 15일부터 정부-기업 가판 담당자들의 퇴근 시간이 저녁 8시 이후로 늦춰진 사정도 따지고 보면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서울 광화문 본사에서 가판 인쇄를 해온 조선일보가 윤전기 교체 작업 때문에 인천 부평 공장에서 가판을 인쇄토록 해 정부기관과 기업에서 신문을 받아보는 시간이 그만큼 늦춰진 것이다.
이 같은 ‘불편’이 8월 중순까지 계속될 전망이지만, 공보-홍보 담당자들은 가판 배달업자들에게 ‘<조선> 배달을 빼달라’고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 배달업체 직원은 “가장 많이 인쇄되는 신문이다 보니 업체에서도 불리하거나 잘못된 기사가 나가는 것에 그만큼 더 신경을 쓰게 된다. 배달이 늦어진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조선>을 안 보겠다는 기업체는 없다”고 전했다.
<조선>은 24일자 사설에서 “(노무현 정부가) 로비를 근절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대응하겠다는 것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신문이 사실을 정확히 보도해야 한다면 방송이나 인터넷 매체도 예외일 수 없다. 가판 구독을 금지한다는 발상도 언론의 속보성과 정보성을 무시한 일방적 제동장치에 불과할 뿐”이라고 폄하했다.
진성호 <조선> 사회부 차장은 “초판이 오보를 막아주고, 기사의 완성도를 높이는 기능을 한다. 미국, 영국도 초판을 내놓는다. 영국 런던에 취재를 간 적이 있는데, 저녁 무렵 워털루역에 초판 신문들이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고 가판의 순기능을 강조했다.
진 차장은 “나 자신이 방송분야 취재를 하면서 KBS를 비판하는 기사를 가판에 썼다가 KBS로부터 항의전화를 받은 일이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10여 년 전 주돈식 편집국장 시절에 우리도 가판을 없앤 적이 있었다. (92년 6월로 확인 - 필자 주) 그때는 기자들이 전날 저녁 10시 반까지 퇴근 안 하고, 기업체에서 항의도 많이 들어오고 그랬다”고 말했다.
진 차장은 “노무현 당선자의 개인적인 소신일 수도 있는데, 한국의 관공서나 일반조직이 한 사람의 반응 때문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것이 민주주의적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반응을 봐서 (노 당선자가) 번복할 수도 있지 않겠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가판 신문의 부작용 중 하나로, 예전에는 “유력 신문이 제시하는 의제를 다른 신문들이 무리하게 따라가 ‘붕어빵 신문’이 양산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지금은 논조가 각기 다른 신문들이 고유한 컬러를 가지기 때문에 그런 경향은 상대적으로 많이 줄었다”는 반론도 제기됐다.
전날 나온 뉴스를 정리해서 전달해야 하는 신문의 특성상 ‘밤사이 여론전’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판 폐지가 힘들다는 현실론도 만만치 않다. 인터넷 시대에 가판을 폐지하고 시내배달판만을 낼 경우 이미 신문(新聞)이 아닌, 구문(舊聞)이 되는 현실에서 가판을 오히려 강화하면 강화했지, 폐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가판 포기는 여론전 포기”
조상기 <한겨레> 편집국장은 “<중앙>이 가판을 폐지했다지만, 인터넷을 통해 다음날 기사를 미리 내보내고 있지 않나? 과점신문들이 가판을 통해 밤새 여론을 형성해버리면 <한겨레>가 다음날 아침 신문을 내놓아도 밤새 여론을 뒤집기가 힘들다”고 난색을 표했다.
조 국장은 “<한겨레>로서는 전날 신문을 지방에 보내야 하기 때문에 신문 제작이 빠를 수밖에 없는 어려움도 있다. 노 당선자가 ‘가판에 개의치 않고 다음날 아침 신문을 보면서 정정당당하게 대응하자’고 얘기하는 것은 일리가 있지만, <한겨레>가 가판을 포기한다면 (여론전에서) 반 이상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노 당선자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민주당은 당선자와 이 문제에 대한 사전조율이 되지 않은 듯 대변인실내에서도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문석호 대변인은 “(가판 구독이) 사실과 다르거나 당 방침과 다른 방향으로 보도될
“좋다” “글쎄” 엇박자
경우 바로잡으려는 소극적인 행위였지 않은가? 일정 부분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미리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생산적일 수 있지 않나? (가판 구독이) 언론의 자유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문 대변인은 “노 당선자가 가판을 보지 않겠다는 것은 언론에 일체 왈가왈부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원칙적으로 맞는 방향이다. 그러나 좀더 고민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장전형 부대변인은 “오는 3월 1일부터 그 지침을 따르겠다. 청와대가 먼저 시작하면 당도 당연히 그렇게 가야 하지 않겠나. 당연하다고 본다”고 적극 환영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가판 이 없다면 몰라도…”
재계에서는 신문이 가판을 폐지하지 않는 이상 노 당선자의 입장 표명이 단시일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낼 것이라는 데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다. 삼성그룹 홍보실 관계자는 “가판신문이 나오는 이상 기업 홍보실에서는 가판에서 기업관련 기사를 찾아볼 수밖에 없다. 가판을 폐지한다면 우리 입장에서야 신문사에 좀더 확인 작업을 제대로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언론비평 주간지 <미디어오늘>의 신미희 차장은 “정부기관 공보관들에게는 가판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가판을 안 보고도 공보 기능이 제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하는데, 노 당선자 한 마디에 가판을 안 보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자신들의 필요 때문에라도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보지 않을까?”고 말했다.
신 차장은 “노 당선자의 말이 선언적인 의미는 있지만, 너무 원론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효성에서는 여러 가지 과제가 남을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가판을 안 보겠다는 일선 홍보담당자들의 의지”라고 덧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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