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미국의 대북한 무력 사용은 물론이고, 이를 검토하는 것 자체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거듭 천명하면서 북한 핵문제 해결을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 심화를 예고하고 있다. 특히 노 당선자의 이와 같은 단호한 입장은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하면서 “모든 수단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다”며 ‘평화적 해결 원칙’이 바뀔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한 이후에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노무현 당선자는 김대중 정부의 연장선상에서 북한 핵개발 불용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국제공조 하에서 한국의 주도적인 역할 등을 3원칙으로 제시해왔다.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은 한국과 미국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수단과 방법에서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작년 10월 핵파문 이후 미국은 외교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 원칙을 밝히면서도 북한의 대화 요구를 일축하고 대북한 압박에 비중을 둬오고 있다. 또한 북한의 핵포기를 유도한다는 이유로 대북한 제재 및 군사 행동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전형적인 힘의 외교를 구사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는 제재나 군사 행동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 북한을 굴복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카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 정부와 차기 정부의 단호한 입장은 같은 평화적인 해결을 말하면서도 협상을 거부한 채 압박과 제재만 강조하는 미국의 ‘평화적 해결’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써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한미간의 갈등은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노 당선자가 거듭 “미국과 다른 의견을 말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모순이며 전쟁을 막고 불안을 없애려면 다른 의견도 말해야 한다”며 대미 발언의 수위를 높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한미간의 표면화되지 않은 그러나 내재되어 있는 근본적인 갈등 요인인 평화적 해결 원칙의 ‘적용 시한’이다. 미국이 대 이라크 전쟁 계획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한 북한이 이른바 금지선(red line)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용 후 연료봉’의 재처리에 들어가지 않은 상황에서 당분간 한미간의 ‘평화적 해결 원칙’은 지켜질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전쟁을 통해서든 유엔 무기 사찰 활동을 통해서든 이라크 문제가 해결되거나 북한이 ‘사용 후 연료봉’의 재처리 단계에 진입할 때도 과연 한미간의 평화적 해결 원칙이 지켜질 것인가에 있다. 즉, 이라크 문제가 해결된 이후 미국의 대북한 태도가 돌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미국의 평화적 해결 원칙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한시적’으로 적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북한이 협상을 강력히 원하고 있는 상태에서 미국의 계속 협상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대 이라크 전쟁 이후 대북 압박을 본격화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깊은 우려를 낳고 있기도 하다.
노무현 당선자가 미국과의 갈등을 불사하고 미국에 대한 발언의 수위를 높이고 있는 것은 위와 같은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지금 시점’에서 대북한 제재 및 무력 사용에 대한 단호한 반대 의지를 천명함으로써, 부시 행정부가 ‘앞으로도’ 딴 생각을 못하도록 예방하겠다는 것이다. 무력 사용 ‘검토’도 반대하겠다는 것은 이러한 노 당선자의 단호한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노 당선자가 부시 행정부의 ‘예방 전쟁(preventive war)’ 전략에 맞서 한반도 위기를 예방하겠다는 ‘예방 외교(preventive diplomacy)’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미국이 협상에 나설 가능성도 북한이 일방적으로 핵포기를 단행할 가능성도 극히 낮은 상황에서 시간은 결코 우리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이 금지선에 접근할 경우 북한의 핵무장을 우려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는 안팎의 목소리도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노무현 정부의 입지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한미간의 이견과 갈등을 정부에 대한 공격의 근거로 삼아온 국내의 보수 강경 세력들이 노무현 정부에 강력 반발할 가능성도 대단히 높다.
상황이 호전되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직면할 최후의 딜레마는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의 공존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전쟁이라도 불사해서 이를 저지해야 할 것인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민족공동체의 소멸을 의미하는 우리로서는 당연히 북한의 핵무장 이후에도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 원칙을 고수해야겠지만,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생각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딜레마에 봉착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전(反戰)에 대한 단호한 의지 못지 않게 반핵(反核)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해결안을 찾고 이를 통한 주도적인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즉, 국민과 국제사회에서 공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치밀하고도 세련된 평화적 해결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가 명심해야 할 부분은 합리적이고도 평화적인 해결안이 부족한 상태에서 미국의 제재나 무력 사용 검토를 반대하게 되면, “노무현 정부가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국내외 강경파들의 근거 없는 그러나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의구심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의구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북한 핵개발 불용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북한의 핵무장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국민과 국제사회에 내놓는 것 이외의 대안은 없다.
즉, 노무현 당선자가 지금까지 피력해온 것처럼 한 손에 ‘한반도 전쟁위기 불용’ 입장을 계속 견지하는 것과 함께 다른 한 손에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안’을 들고나올 때, 반전과 반핵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예방 외교의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는 핵문제를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이 증폭될 때도 노무현 정부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 국민과 국제사회로 하여금 “문제를 풀 수 있는 충분한 방법이 있는데, 왜 미국은 협상에 나서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기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언론과 적지 않은 사람들은 노무현 당선자의 외교 경험이 부족하고 통일·외교·안보팀의 인적 자원이 부족해 ‘과연 한반도의 위기를 슬기롭게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우려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노무현이라는 새로운 정치 리더십은 그 동안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평가를 무색하게 만들어왔다.
돈과 조직, 계보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분명 ‘준비된’ 대통령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원칙과 소신을 갖고 정치 인생을 밟아옴으로써 기존 정치인이나 보수 언론이 아닌 국민들의 지지와 참여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을 일컬어 ‘국민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노무현 정부가 펼쳐나가야 할 ‘예방 외교’는 준비된 것도, 주어진 것도 아닐 수 있다. 이제 ‘대통령 만들기’에서 ‘평화 만들기’로 국민들의 시야가 넓어져야 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위력을 발휘한 소신과 원칙이 국제사회에서도 지지와 협력을 얻을 수 있도록, ‘참여’의 정신에 기반을 둔 지지와 협력, 비판과 감시를 국민들이 펼쳐나갈 때,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을 기우로 만들 수 있는 힘이 마련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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