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회장 방현석)’을 주축으로 한 20여 명의 문인들이 지난 1월26일부터 31일까지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다녀왔다. 한국문인들의 이번 방문은 최근 실천문학(대표 김영현)에서 번역·출간된 베트남 작가 반레의 소설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의 출판기념회와 한국·베트남 문인교류의 밤 개최가 주된 목적이었다. <오마이뉴스> 기자는 이들의 짧았지만 인상적인 여행에 동행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풍광을 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한국을 떠나온 지 사흘째 되는 1월28일. 킬링필드의 처참한 대학살과 앙코르와트의 아름다움이 기이하게 겹쳐지는 나라, 티없이 맑은 웃음으로 나를 감동시킨 맨발의 천사들이 사는 나라 캄보디아를 떠날 시간이 됐다.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바다보다 더 넓고 광대한 황톳빛 ‘톤레삽 호수’와 수상가옥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씨엠립 시내를 빠져 나와 울퉁불퉁한 비포장을 30여분 달려 선착장에 도착했다. 채 열 살이 되어 보이지 않은 소년이 15인승 낡은 모터보트의 운행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돈 따라 먹거리 찾아 헤매는
톤레삽의 아이들

음식물과 인간의 배설물이 섞여 썩어가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수상가옥 지역을 벗어나 한참을 달리니 탁 트인 풍경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호수가 아니라 바다 같았다. 뱃머리에서 촘촘하게 부셔지는 햇살의 입자. 멀리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몇 마리가 날았다. 승객들의 머리 위로 따갑게 내려 쪼이는 햇볕을 가려줄 차양을 내리러 소년이 맨 뒷자리에 다리를 뻗고 앉은 내 곁으로 왔다. 그런데, 요놈 봐라. 내가 만난 대부분의 캄보디아 사람들이 ‘당신 이름이 뭐냐’는 영어조차도 못 알아들었는데, 관광객들을 자주 접해서인가 영어를 제법 한다.
아버지는 내전 때 사망했고 엄마는 다리가 불편하다는, 그래서 자신이 일을 해 돈을 번다는 이 열두 살 꼬마의 주머니에 여기를 떠나면 환전이 불가능한 캄보디아 화폐를 모두 찔러주고, 선주(船主)에게 선물하라고 여분의 담배까지 한 갑 건넸다. 그게 고마워서였을까? 내 몸무게의 삼분의 일이나 될까말까한 조그맣고 여윈 녀석이 배에서 내리는 나를 부축한답시고 끙끙댄다.
아, 산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얼마나 눈물겨운 일인가. 캄보디아에선 부자들이나 먹는다는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가 점심상에 올랐다. 그 꼬마가 살아내야 할 가시밭길의 생을 생각하며 고기가 자꾸만 목에 걸렸던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사흘간의 추억이 평생의 기억으로 남아 있을 캄보디아를 뒤로 하고 베트남을 향했다. 수천 미터 상공에서도 확연하게 가늠할 수 있는 앙코르와트와 톤레삽 호수. 그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마음속 인사도 전할 틈 없이 1시간만에 비행기는 호치민 시에 도착했다.
저건 뭔가? 도로를 가득 채운 오토바이… 오토바이… 오토바이의 행렬. 호치민 시에만 300만대 이상의 오토바이가 있다고 한다. 대중교통이 부족한 탓에
서울시의 택시와 자가용의 역할을 하는 것이 베트남의 오토바이. 거리마다 떼지어 몰려다니는 수천 대의 오토바이는 생경하고, 생소한 풍경이었다.
좁은 도로를 그 많은 오토바이가 밀려다니는데도 사고나 싸움이 거의 없다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이었다. 교통사고는 도로의 확충과 카파라치의 양성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느긋한 마음을 가지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닐까?

좁은 도로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
강도 들끓어 밤거리 위험천만

호텔에 짐을 풀고, 반레의 집에서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의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자정이 가까워서 호치민 시내로 들어온 일행. “베트남의 밤거리는 위험합니다. 안내자 없이 다니면 소매치기나 강도 당하기 딱 좋아요”라는 가이드의 협박과 경고에도 누군가가 은근슬쩍 모반을 제의한다. “야, 생각해봐라. 저희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우리가 무섭지, 베트남 사람들이 뭐가 무서워. 그 살벌하다는 서울의 밤거리에서도 마음대로 살았는데, 여기까지 와서 얌전한 애들처럼 가이드 말을 들어?” 백 번 옳은 말이다. 발의(發意)가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의 시간은 짧았다.
설날 준비가 한창인 호치민 시내를 아이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걸어 한국으로 치자면 노점 조개구이집쯤 되는 술집에 10명이 넘게 진을 치고 앉았다. ‘333 맥주’와 달큰하면서도 탁 쏘는 맛은 덜한 베트남소주를 섞어 잔을 돌리니 빵빵대는 오토바이의 경적과 함께 이방인의 마음도 애드벌룬인양 공중을 떠돌았다.
우리의 바로 옆 테이블 연인은 불편함도 잊은 채 어깨를 감싸고 쌀국수를 먹으며 밀어를 속삭이고, 베트남의 어린 소녀는 그들에게 다가가 장미 한 송이를 권하고 있다. “오냐, 그 꽃 내가 사주마.” 우리 중 일찍 취한 누군가가 한꺼번에 네다섯 송이의 장미를 사서 고단하지만, 즐거운 여행을 함께 하고 있는 일행들에게 선사했다.
서울의 인사동 혹은, 신촌과 다를 바 없는 기분 좋은 취흥으로 이어진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됐다. 그 자리 끝에서 동행한 시인 하나가 그랬던가? “그래, 사람 산다는 게 여기나 거기나 뭐가 다를라고...” 저쪽으로 아내와 아이 둘을 한꺼번에 싣고는 무엇이 좋은지 껄껄대는 베트남 아버지의 과적(?) 오토바이가 달려가고 있었다.
숙취는 한국과 베트남이 같았다. 더부룩한 위장을 안남미로 만든 죽과 초콜릿향이 진하게 배어 있는 베트남 커피로 달래고 아침 일찍 패망 전 월남의 대통령궁으로 사용된 건물을 찾았다. 지하벙커에 전시된 베트남전 관련 사진은 외세에 국민의 생존을 기댄 나라가 어떻게 불행해지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옥상에서 바라보는 시내 풍경이 서울과는 판이하다. 시원시원하게 조성된 녹지와 도시 요소요소에 위치한 공원들, 중세 유럽풍의 건물들. 소설가 방현석이 농담 섞인 목소리로 이런 말을 던질 법도 했다.

해방영웅 호치민에 대한
베트남인 존경심은 여전

“그래도 프랑스 애들은 식민지 경영을 문화적으로 했네. 이거에 비하면 일본놈들은 철도 놓는다고 괜한 사람 팰 줄이나 알았지. 쯧쯧...” 호치민은 말 그대로 베트남의 영웅이자, 존경받는 아버지였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그의 동상과 사진, 초상화. “사후(死後)에 나를 기리는 어떤 조형물도 만들지 말라”는 것이 호치민의 유언이었다지만, 강요되지 않은 베트남 국민들의 사랑과 그리움까지는 그도 어쩌지 못한 모양이다. 초등학교 교사에서 프랑스 유학생으로 다시, 베트남 혁명의 지도자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호치민의 생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머릿속을 지나치고 있었다.
호치민 시에서 메콩강으로 가는 길의 정체는 대단했다. 한국보다 더 뻑적지근하게 설을 쇠는 베트남 사람들의 대이동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이 걸린다는 귀향길. 하지만, 그들 역시 만면에 웃음이다.
고향과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도 거기와 여기가 다르지 않았다. 예정보다 두어 시간이 늦은 오후 늦게서야 메콩강 선착장에 도착했다. 손바닥만한 섬에 들러 베트남 전통차와 과일을 먹고,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밀림속 수로(水路)의 정취를 느껴보라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전형적인 외국인 관광코스였다. 그래서였을까? 거기서 만난 사람들에게서는 사회주의의 향취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기계보다 정확하고 빠른 손동작으로 상품용 캐러멜을 포장하는 여자아이도, 나룻배에 관광객을 싣고 물길을 헤쳐가는 아주머니도, 계피나무 껍질로 만든 슬리퍼를 파는 아저씨도, 내게 베트남산 ‘사이공’ 담배를 판 소녀도 슬프지만 ‘평등의 이념’보다는 ‘암녹색 달러’에 더 크게 웃었다.
하긴 어떤 사람이 있어 향기롭고 알싸한 냄새를 피우며 혀 날름거리는 맥도날드와 코카콜라의 유혹을 낡은 <자본론>이 설파하는 이데올로기만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 인간은 변했고, 그들 앞에도 내 앞에도 메콩강만이 도도할 뿐이었다.
바로 그 메콩강만은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맥도날드와 코카콜라의 나라에서 온 미군 헬기에 의해 무더기로 살포된 최악의 고엽제 CS파우더에 고통스레 말라가던 베트남 정글의 신음을,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는 눈을 가지지 못한 네이팜탄에 팔다리가 날아간 죄없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흘러들어온 피가 자신의 몸을 붉게 물들이던 베트남전쟁의 비극과 참화(慘禍)를. 메콩강 선착장에서 호치민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 안에서 내 심경은 복잡했다.
그 복잡한 마음 속 풍경은 내일 둘러보기로 예정돼 있는 전쟁기념관과 항미의 성지(聖地)라 지칭되는 구찌터널에 대한 기대를 더욱 부풀렸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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