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덕 현 편집국장

   
옛날 농경사회에서 치수(治水)는 위정자들이 갖춰야 할 제 1의 덕목이었습니다. 치수를 잘 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 성군여부가 판가름났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아예 가물지 않거나 홍수가 없는 것입니다.

극심한 가뭄이나 난데없는 홍수로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임금은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며 몸을 깨끗이 한 후 금기, 금욕에 들어 가는 등 몸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태종은 식음마저 전폐하며 목숨을 걸고 비를 내리게 했겠습니까. 매년 5월 10일(음력)에 내린다는 태종우는 비록 전설로 내려오는 얘기이지만 그 메시지가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새해 우리는 연초부터 비를 흠뻑 맞게 됐습니다. 대선후보 지지도 1위를 달리는 이명박씨는 한천작우(旱天作雨)를 올해 4자 화두로 제시했습니다. 이는 맹자의 가르침으로, ‘한 여름에 가물어서 싹이 마르면 하늘이 구름을 지어 비를 내리게 한다’는 뜻입니다.

역시 연초부터 용꿈을 부지런히 꾸고 있는 고건씨는 이에 질세라 주역에 나오는 운행우시(雲行雨施)를 들고 나왔습니다. 구름이 움직이니 시원하게 비가 뿌린다는 뜻입니다. 말로 먹고 사는 정치인들이라서 그런지 참 그럴듯한 단어를 용케도 찾아 내 잘 써먹고 있습니다.

물론 두 사람의 사자성어는 지난해 연말 교수신문이 전국의 교수들을 설문조사해 2006년 한 해를 평가하는 4자성어로 밀운불우(密雲不雨)를 정한 것에 대한 화답인 셈입니다. 구름만 빽빽하고 정작 비가 내리지 않는다며 교수들이 답답함을 호소하자 이들 대권주자들이 순발력있게 한 말씀씩 한 것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자료를 뒤적이다가 그럴듯한 단어를 찾아 냈겠지만 이 짧은 4자에도 당사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그대로 묻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얼핏 봐도 엉겁결(?)에 고른 것 치고는 각각 기가막힌 어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명박씨의 한천작우는 하늘이 구름을 지어 비를 내리게 한다는 이른바 작위적 이미지가 강한 반면 고건씨의 운행우시는 구름이 움직이니까 스스로 알아서 시원하게 비를 내린다는 유유자적의 의미를 언뜻 떠올리게 합니다. 이명박은 현대맨 출신에다 청계천 복원과 경부운하 건설 공약 때문인지는 몰라도 밀어붙이는 강한 추진력으로 연상되고 있는데 공교롭게 그의 사자성어도 이런 냄새를 물씬 풍기는 것같습니다.

반면 고건의 사자성어는 언뜻 일의 성사에 있어 주체로부터의 발산보다는 주변의 변수에 의해 좌우된다는 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를 악의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니면 말고’가 되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비약할 필요는 없을 것같습니다.

그러나 역대 정권을 거치며 실세와 제 2인자를 거듭해 온 처세에 대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을 꼬집고 있는 마당에 이런 하찮은 사자성어에서나마 화끈한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성인가요중 제목이나 가사에 비(雨)가 나오는 노래는 예외없이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이에게 순수하고 가슴 저려오는 정서를 자극합니다. 배호의 ‘누가~울어’가 그렇고 채은옥의 ‘빗물’이 그렇습니다. 요즘 잘 나가는 비라는 가수는 또 어떻구요. 올해는 제발 정치권이 지난해 못 내린 비를 알아서 선사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그런데 그 비가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거나 혹은 가뭄에 대지를 적시는 단비가 아니고 갑작스런 기습 폭우나 진눈깨비로 변질되면 국민들은 또 비맞은 새앙쥐가 되어 거리를 비척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연초인데 일단 기대를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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