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 하루 중에 제일 좋은 시간은 역시 햇빛이 길게 숨어드는 한낮이다.
약국 유리벽을 통해 밀려들어오는 그 따사로운 것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제아무리 엄동설한이라 해도 양지바른 창 아래는 그래도 온실인 것을. 오늘도 그 양지바른 자리에 앉아 해바라기 하다가 문득, 계시우? 하고 들어오는 낯익은 손님 때문에 얕은 졸음을 깬다.
우리 약국을 찾는 손님들 중 대부분은 병원 처방전을 들고 오는 이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병원비가 무서워 그저 당장에 고통을 덜어낼 약만으로 힘든 나날을 견디어 나가려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처방전 없이 판매할 수 없는 약을 달라며 떼를 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기 병은 자기가 더 잘 안다고 그저 약이나 달라며 습관적인 약으로 연명하려는 이들도 있다.
조금 전 그 손님도 바로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의약분업을 실시한지도 몇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의료혜택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줄어들지 않고, 심심하면 뉴스거리가 되는 첨단의 의료기술과 기적의 약이란 마치 죽은 사람도 살려낼 기세지만 그런 유토피아도 결국은 부자들만의 유토피아일 것이라는 건 이렇게 햇빛아래 졸다가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대통령이 바뀌고 세상이 바뀐들 이 가난이 사라질 수 있을까.
어쩌면 가난한 이에게 법이나 제도란 그 것이 아무리 획기적인 것이라 해도 지금 내 손에 들고있는 따듯한 국밥 한 그릇 만큼도 희망이 되지 못 할 것이다.
지금 그들은 이 겨울 속에 있고, 새해가 됐다고 모진 칼바람이 부드러워질 기세도 없어 보인다. 정치는 새 희망을 말하지만 그건 때마다 외치는 구호일 뿐, 아니 그리되기를 바라더라도, 지금 당장 무엇을 쥐어 줄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저금통을 깨어 모금함에 넣는 아이들의 착한 손, 송년회 대신 양로원을 찾는 아름다운 모임, 그런 것들이 있기에 이 엄동설한에도 따듯한 햇살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게 아닐까. 결코 정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요즘 어딜가나 정치와 개혁에 대한 얘기로 넘쳐난다. 정치와 개혁을 얘기하든, 정치가 개혁하기를 얘기하든 그것은 그것대로, 이 시간 내 따듯한 창가 저편에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견디어 가는 가난한 이웃들이 있다.
정치얘기 나중에 하고, 좋다는 법이나 제도에 대한 얘기도 바쁘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그들의 고단한 이 순간 순간의 시간에 비하면.
햇볕아래 졸던 게 부끄러워 그랬던가? 얼마 안 되는 약값가지고 큰 인심쓰듯 그냥 가시라 보내면서 소용도 없을 인사를 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고 규칙적인 식사를 하세요. 술드시지 마시고, 과로하지 마세요.”
들을 리 없고,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겠지만, 그게 내 딴의 걱정이고 인사였다.
햇볕아래 앉아 졸다보면 그 따사롭고 좋은 것이 이토록 욕심 많은 사람에게도 남 걱정하는 마음을 다 만들어주는 모양이다. 아니 그러고 보면 결국 내 등이 따듯해서 남이 눈에 보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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