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덕 현 편집국장

   
지난 90년대 말 쯤, 리영희선생이 쓴 ‘스핑크스의 코’라는 책이 한 때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본인이 이집트 여행에서 느낀 것을 이 에세이집의 제목으로 달았던 것입니다. 이집트에 수없이 많은 석상들은 공통점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원래 정상적으로 있었는데 도중에 뭉개지고 깨졌다고 봐야 맞습니다. 이들 석상의 주인공이 대부분 신이나 왕, 왕비였기 때문에 코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무슨 사연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중세에 이집트를 점령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보다 우월한 문명을 가진 이교도 들에게 피해의식을 가진 게 원인이었습니다. 때문에 이교도 우상들의 생명의 원천인 숨(호흡)을 끊어버리기 위해 석상들의 코를 모조리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코가 한치만 낮았더라도 세계역사가 바뀌었다고 하는 클레오파트라의 권력의 상징, 스핑크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코를 잃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여행에서 이를 목격한 리영희선생은 스핑크스의 코를 뭉개버린 것은 과거 군사독재시절에 한국사회를 짓누른 반지성, 반문화, 독단, 무지, 폭력숭배와 다름없다면서 이를 적시하고 반성하는 자신의 책에 이런 제목을 달았던 것입니다.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살벌하던 70년대에 고고하게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 발간)를 설파하며 독재 상태에서 ‘우상과 이성’(1977년 〃)이 상충하는 고뇌를 뼈저리게 절감하다가 결국 ‘분단을 넘어서’(1987년 〃)는 ‘자유인’(1991년 〃)이 되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년 〃)는 신념을 몸소 실천했던 선생이 가장 경멸했던 것은 지식 문화 종교 예술 정서의 모든 면에서 오로지 자기의 것만을 강요하는 지배적 문명의 반역사성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리영희 선생이 충북에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12일로 예정됐던 제 1회 단재언론상 수상을 거부한 것입니다. 더 가슴아픈 것은 선생이 주최측에 전달한 수상거부 이유입니다. 단재언론상과 관련해 단체들간 법정 소송으로까지 번지는 추악한 이면의 실상을 알게 된 것이 수상거부의 단초라고 밝혔습니다. 지역에서 행해지는 단재 신채호에 대한 추모 및 기념사업이 단체간 이해상충으로 한목소리를 내지 못함을 질타한 것입니다.

‘추악한’이라는 어휘에 마치 망치로 뒷머리를 가격당하는 기분이었다면 어찌 나 뿐이겠습니까. 선생의 말엔 분명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충북의 정체성을 위해 그토록 단재 정신을 소중히 하고 싶다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충북이 추하게 되어 버렸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참담할 뿐입니다.

과거 암울했던 시절, 처절하게 핍박받으면서도 역사발전을 위한 이성의 각성을 피를 토하며 촉구했던 그 분이었습니다. 하물며 그 분이 가장 증오하는 지배적 문명의 반 역사성, 반지성을 단재 신채호를 둘러싼 충북의 아귀다툼으로 재현했으니 그 결과는 뻔하지 않습니까. 그 분의 분노가 눈에 선한 것같습니다.

지금, 스핑크스의 코가 아닌 충북의 코를 흉물스럽게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충북협회 사태입니다. 끊임없이 충북에 추잡함만을 안기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젠 리영희선생처럼 결연한 결별을 선언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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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이들로부터 ‘충북’을 박탈하고 하루 빨리 “충북이 결코 추하지 않음”을 대내외에 선포라도 해야 지금의 상실감이 치유될 것같습니다. 이런 자존심이 간절해지는 허허한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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