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槐山)의 큰 인물 벽초 홍명희의 자주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따라서

얼마 전, 나이 차가 꽤 나는 동향 출신의 언니들과 한 자리에 있을 때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한 건 자기네 나라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 거잖아.」「그랬지요.」「그럼 만약 그대로 우리가 해방이 안 되고 완전히 일본이 되었다면, 우린 지금쯤 훨씬 잘 살고 있겠다.」

▲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와 경술 국치 때 순국한 부친 홍범식 의사의 고향, 충북 괴산. 벽초 선생은 일찍이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 1919년 3.1운동때 괴산에서 충북 지역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로 인한 옥고를 치른 후, 동아일보 주필과 시대일보 사장으로서의 언론 활동과 당시 민족교육기관으로 이름 높던 오산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운동을 했는가 하면,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등의 민족운동을 했다. 그리고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 소설 [임꺽정]을 집필했는데, 이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로 민족 문학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이 부자 나라이니까, 지금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잘 사는 나라의 국민인 게 더 낫지 않았겠느냐는 게 예순이 가까워오는 고향 언니의 생각이었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모세와 애굽을 탈출하기 전의 시절로 돌아가자던 옛 히브리인들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곧바로 카메라를 챙겨 그 언니와 나의 고향, 괴산으로 향했습니다. 차창으로 지난 세월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모래재 고갯마루에서 괴산의 특산물 고추를 들고 서있는 장사의 동상도 스쳐갑니다. ▲ 홍명희 문학비-괴산 제월리 공원에 있다. ▲ 홍명희 문학비 앞에 후배 문인들의 노둣돌이 놓여지고 있다.
▲ 한창 복원 중인 홍명희 생가의 안채 이 길은 내가 ‘우리 고장의 역사문화 전달자’로서 삶의 방향을 잡았을 때, 많이 갔던 길입니다. ‘임꺽정’ 소설을 읽거나 적어도 임꺽정 드라마를 본 어른 세대에겐 진한 여운이 느껴지는 여행 코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 ‘임꺽정’ 세대가 아닌 어린 학생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공력을 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런 고민 끝에 어린이를 위한 홍명희 역사문학 기행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난 추억 중에는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것도 있게 마련입니다.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이들 중의 누군가의 말이 가는 차안을 답답하게 합니다. ‘홍명희에 대한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 어쨌든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그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극히 일부의 시각이다......’ 차창을 내립니다. 초겨울 맑은 바람이 꽉 막힌 공간을 일깨워 차안을 생기 나게 합니다. 빛과 어둠도 이처럼 한 흐름 속에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확연한 선을 긋고 있는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니라, 비춰지는 각도가 다를 뿐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원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비슷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괴산읍 초입의 괴산군민회관 앞 커다란 비석의 주인공 홍범식 열사와 그의 아들 홍명희가 서 있는 역사 속에서의 위치도 그러합니다. 두 사람 모두 꺼져가는 촛불 같은 나라를 살리는 일과 이 나라에서 함께 사는 백성들을 염려하는 일로 한 생을 살다간 이들입니다. ▲ 괴산만세운동비-기미년 3월19일, 괴산 시위를 시작으로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족 운동인 삼일만세운동이 충북 전체로 점화된다
대부분의 동시대 사람들이 가지 않았던 고난의 길을 대를 이어 걸어갔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일완 홍범식과 아들 홍명희가 받는 역사의 조명은 많이 다릅니다. 많이 엷어지긴 했지만 아들 홍명희에게 드리워진 어둠은 아직 깊기만 합니다.

홍범식 열사와 그의 아들 홍명희. 두 사람 모두 대부분의 동시대 사람들이 가지 않았던 고난의 길로 대를 이어 걸어갔는데, 그들에 대한 역사의 조명이 많이 다른 것은 다름 아닌 관점의 차이

하지만 역사에서의 조명의 각도는 한 시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대의 결을 따라 빛과 어둠의 각도가 변해갑니다. 이는 같은 대상을 가지고, 보는 이들의 관점이 달라진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일완 홍범식의 묘소가 있는 괴산읍 제월리로 가면서 나는 그 동안 내가 해왔던 역사 교육에 대해서 다시 생각합니다. 아니, 역사 교육은 역사의식을 기르는 일이라고 누차 말해왔으면서도 정작 내 삶에서 이를 얼마나 실천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 홍범식의 묘소가 있는 제월리 고산정.달천(達川) 변의 고산구경중 제5경인 제월대 옆에 있다. ▲ 경술국치 때 순국한 의사 홍범식 묘소 괴산읍 제월리
가슴이 따가워집니다. 발걸음도 무거워지고 고개는 자꾸만 땅 쪽으로 숙여집니다. 잎 다 떨어낸 제월대 숲 어디 한 군데도 몸 숨길 곳이 없습니다. 제월대 홍명희 문학비가 있는 광장도 휑하기만 합니다. 홍명희 문학비 앞에는 몇몇 문학인들이 통일의 노둣돌을 놓고 있습니다. 아직은 ‘일부 사람들’인 그들이지만 단단한 돌만큼이나 역사를 이어가는 손짓이 사뭇 야무져 보입니다.

노둣돌을 징검징검 건너며 말끔한 문학비 앞면의 글을 봅니다. 벽초 홍명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소설 ‘임꺽정’을 처음 쓰면서 한 말입니다.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조선 정조로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벽초 홍명희가 이 말을 했을 때, 소설 ‘임꺽정’을 썼을 때, 그 때가 언제였는지요. 나라를 송두리 째 빼앗긴 일제강점기의 한 가운데가 아닐는지요. 모두의 가슴에서 희망의 빛은 사라지고 온 마음이 꽁꽁 얼어붙기만 했던 그 때가 아니던가요.

그런데, 그런데 역사의 길에서 보면 춥고 어두웠던 시절이 바로 정신 차리고 다시 살 기회인 경우도 많습니다. 어두운 밤이 한낮의 휴식이자 다음 날의 준비인 것과 마찬가지로, 겨울 역시도 생산의 휴식이자 다음 봄을 준비하는 공간인 듯합니다.
 
   
▲ 괴산 삼일만세 운동의 진원지, 홍명희 생가 사랑채
겨울 숲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스스로 떨 켜를 만들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를 알게 하고, 그처럼 버리고 비우는 일이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란 것을 나무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삶의 원형도 그런 순환의 과정이 아니겠는지요. 숲이 포용과 관용의 공간이듯, 고향도 우리들 삶에서는 너그럽게 품어 안아줄 그런 공간이 아니겠는지요.

벽초 홍명희는 이곳 제월대에서 자주 낚싯대를 드리웠다지요. 어릴 적 나는 제월대 꼭대기 고산정(孤山亭)에서 소풍 김밥을 자주 먹었습니다. 혼자 가는 길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로 가는 길에서는 내면의 소리가 잘 들려옵니다. 마른 잎을 바스락거리며 밟고 있는 발소리도 한층 높아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숲 길가 가시덤불 속에서 박새가 포르르 명랑하게 날아갑니다. 나무가 내어준 열매를 먹은 저 새가 옮겨준 그 곳에 또 언젠가는 덤불숲이 둥글게 만들어지겠지요. 괴산에서 자라던 내가 청주에서 둥지를 틀고 사는 것처럼.

우리들 삶의 원형도 순환의 과정이 아니겠는지, 숲이 포용과 관용의 공간이듯, 고향도 우리들 삶에서는 너그럽게 품어 안아줄 그런 공간이 아니겠는지

도시락을 덜어낸 소풍 가방이 가뿐해지는 것처럼, 지나온 삶을 마치 필름 보듯 꺼내 놓으니 바랑 속 인생 과제도 한결 가벼워집니다. 제월대에서 괴산읍내로 오는 길에 역말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보폭이 작았던 어릴 적에는 이 마을 어귀가 곧 집이 다 왔음을 확인하던 장소였습니다. 그 때, 귀신 붙은 집 앞이라며 종종걸음으로 재빨리 도망치곤 했던 이 길을 지금 나는 천천히 걷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다 쓰러져 가던 홍명희 생가가 안타까워 혀를 끌끌 찼는데,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홍범식 생갗라는 글씨 옆에 당연히 붙어 있어야 할 ‘홍명희’란 세 글자가 없어서도 그렇고, 뼈대만 보아도 옛날 사대부가의 생활상이 절로 상상되던 옛 모습이 간 데 없이 복원된 새 건물이 생경스러워서도 그러합니다. 게다가 어릴 적 내 사진 속에서 분명하게 남아있던 초가지붕의 행랑채가 너무도 큰 기와집으로 지어지는 데는 벌린 입을 어찌 다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더욱 생생한 발걸음으로 홍명희 생가 뒷산으로 오릅니다. 어린 시절, 온몸을 괴롭히던 상처를 깨끗이 낫게 했던 기억의 약샘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향의 언덕을 오르는 길은 치유의 길인가 봅니다. 여기까지 온 발걸음이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 새삼 보입니다.

넘어지고 또 일어섰던 내 안의 힘도 대견해보입니다. 앞으로 여기에서 나는 홍범식, 홍명희뿐만 아니라, 그의 사돈 위당 정인지가 갔던, 외롭지만 명료했던 그 길을 아이들에게 또 가리켜 보여줄 것입니다. 또한 봄날, 진달래를 따먹으며 김소월(홍명희 사위)의 그 애절한 시 한 구절에서 비추고 있는 희망의 빛을 함께 노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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