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식박사, 충북동학혁명 기념사업회 추진

-1893년 3월 11일, 지금의 보은 외속리면 장내리는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전라 경상 충청 경기 강원 등지로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은 곧 수만명으로 불어 났고, 군중들 사이에선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외세배격 정치적 구호가 거침없이 등장했다.

이날 집회는 정부의 탄압이 극에 달하자 최시형 손병희 등 동학 지도자들이 전국의 교인들에게 ‘일제히 모이라’는 통문을 띄워 불과 며칠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매일 전국의 각처에서 마치 엑소더스를 연상시키듯 수백명 단위로 몰려 들면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것같았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어윤중을 내세워 토벌을 지시했고, 4월 1일 어윤중은 최시형 손병희를 만나 해산을 종용하는 고종의 뜻을 전하자 결국 지도부는 해산을 결정한다. 이에 가렴주구로 상징되는 각종 수탈에 반기를 들고 전국에서 백리, 천리길을 마다않고 단숨에 달려 온 농민대중들이 크게 반발하면서 군중 다수가 정봉준이 주도한 전라 원평집회에 가담하는가 하면 고향으로 돌아 간 사람들도 부패한 조정과 지방 관아에 맞서 반골의 기치를 높이 치켜세우게 된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보은집회의 전개과정이다. 결국 보은집회는 그 이전에 전국적으로 산발하던 각종 농민봉기와 동학운동이 최초로 한 목소리로 분출된 사회변혁을 위한 혁명의 모태가 됐다.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 1차봉기를 촉발시킨 근원은 바로 1년전 핍박받는 전국 민초들의 의지를 처음 하나로 결집시켰던 보은집회였다

1894년 12월로 접어 들면서 1년간 장렬하게 타올랐던 동학혁명의 불꽃은 급격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해 9월에 시작된 2차 봉기가 실패하면서 혁명군 지도부가 줄줄이 체포 내지 영어의 몸이 됐기 때문이다. 각각 공주와 청주쪽으로 나눠 두곳을 먼저 함락한 후 최종적으로 조정 진격을 목표로 했던 전략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공주를 책임졌던 전봉준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후 논산을 거쳐 전라도 태인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지만 12월 2일 순창에서 체포됐다.

또한 11월 13일 청주성을 공격했던 김개남도 앞서 공주전투의 패배로 전열이 무너진 뒤 역시 태인으로 후퇴했다가 12월 1일 체포된다. 결국 전라도까지 토벌군에 쫓겨 내려간 동학농민군은 12월 중순 전남 나주지역에서 마지막 격전을 치른 뒤 최후를 맞게 된다. 이로써 조선 전역을 피로 물들게 했던 동학농민혁명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릴 상황에 있었다.

이 때 꺼져가던 혁명의 불씨가 마지막으로 타 오른 곳이 보은이다. 공주 우금치 전투와 청주성 전투에서 패한 연합동학농민군이, 이후 퇴각하며 벌인 산발적인 전투에서도 연속 패하는 등 갈피를 못잡았지만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은 몇 차례의 굴곡을 거쳐 12월 16일 보은 읍내를 점령, 다시 혁명의 기치를 높이 쳐든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때 농민군 대열은 무려 30리에 걸쳐 있었다. 원성의 대상인 관아를 습격하고 탐관오리를 응징하던 보은 농민군은 최시형 손병희 임국호 정대춘 이국빈 배학수 박장준 이원팔 등 지도부를 중심으로 대열을 합쳐 지금의 보은읍 북실 마을로 들어가 토벌군과 대치한다.

드디어 12월 17일, 이날 따라 강추위를 동반한 폭설이 퍼붓는 상황에서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 연합 병력의 기습공격을 받는다. 쌍방간에 밤새도록 계속된 공방전의 결과는 선혈이 낭자한 채 나뒹구는 농민군 전사자들의 아비규환이었다. 대접주 임국호 이원팔 정대춘 등 동학의 핵심간부 상당수가 전사했고, 농민군 400명 이상이 사살됐다.

그러나 어느 자료에 의하면 무려 2583명이 이곳 북실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북실전투를 끝으로 동학농민전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로써 안으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밖으로 외세를 물리치고자 했던 동학농민전쟁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게 된다.

앞의 두가지 사실은 동학혁명과 충북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동학농민전쟁은 충북에서 시작돼서 충북에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충북의 동학인식은 말 그대로 남의 일이었다. 동학하면 전라도로만 이해했고, 이 때문에 충북에서의 동학연구와 기념사업도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동안 충북에선 보은을 중심으로 재조명 노력과 기념사업이 나름대로 전개되어 왔지만 여건상 포괄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동학을 연구하는 도내 전문가들이 항상 이 점을 아쉬워한 것은 자명한 사실. 어찌 보면 충북의 소중한 역사를 마냥 다른 곳에 빼앗긴 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성과 각성이 이제서야 구체적 움직임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7일 청주문화원에선 도내 뜻있는 이들이 모여 가칭 충북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발기인 모임을 가졌고 곧바로 창립 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취지는 충북의 동학농민운동을 제대로 조명하기 위함이다. 여기엔 그동안 무관심 속에서도 외롭게 충북의 동학정신 재현에 힘쓰던 보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대표 김성장)와 박진수씨 등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관계자도 참여했다.

도내에서의 관련 활동이 비로소 광역화 개념을 띠게 된 것이다. 실제로 충북에선 보은 뿐만 아니라 청주 충주 청원 괴산 영동 등 각 지에서 동학혁명 전 농민봉기와 동학운동이 그 어느 지역보다 활발하게 전개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식의 단초를 제공했다. 7일 출범한 준비위엔 도종환(시인) 강태재(직지포럼 대표) 이철수(판화가) 연방희(세무사) 윤석위(충북숲해설가협회장) 정상혁씨(전 도의원) 등 진보적 지식인들이 가담, 기초를 다지고 있다. 때가 늦은만큼 각계의 호응이 예사롭지 않다.

일련의 이런 움직임을 주도한 사람은 충북학연구소 김양식박사(사진)다. 김박사는 충북개발연구원 부설 충북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임용된 후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전라도와 전봉준을 중심으로 인식하던 자신의 동학혁명 역사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은 충북 동학혁명의 실체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그는 충북의 동학연구에 매진했고, 2001년 11월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교양총서 1집을 내게 되는데, 이 책이야말로 충북 동학혁명의 실체를 밝힌 교과서가 되는 것이다. 김양식박사는 “충북에서 일어난 동학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동학농민전쟁은 충북에서 시작해 충북에서 끝났다. 그런데도 그동안 충북은 이에 너무 무관심했다. 이건 무관심이 아니라 무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몇 년동안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이제서야 각계의 공감으로 기념사업회 추진을 모색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김박사는 “충북의 동학혁명을 재정립하는 일은 충북 정체성의 확립과도 직결된다. 충북이 역사적으로 정체되거나, 소극적이거나, 국가적 현안에서 주변인에 불과했다는 그릇된 인식, 이른바 지역적 자학과 피해의식을 바로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오히려 충북이 과거 동학혁명을 주도함으로써 사회적 변혁과 역사발전을 선도한 근성있는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를 도민들에게 적극 알리면서 관련 기념사업을 거국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겠다”고 밝혔다.

충북이 동학혁명 인식에 있어 얼마나 무지, 무관심했는지는 1894년 9월 청주성전투의 예를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지금의 청주 육거리와 모충동 남들을 중심으로 무심천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토벌군간의 전쟁은 당시 무심천 물을 붉게 물들일 정도로 숱한 희생자를 냈다. 청주전투는 같은 시기에 벌어진 공주 우금치전투와 함께 동학혁명의 결정적 근간을 이루었는데도 현재는 청주에서조차 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충북엔 동학혁명의 실상을 보여주는 유물,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청주 모충동 언덕바지의 모충사와 충주 가흥의 일본군 위령비는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모충사는 관군 사망자를 기리기 위해 당시 정부가 세운 사당이고, 현재 충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일본군위령비는 충주 가흥에 주둔하던 일본 병참군 전사자들을 위한 것으로, 이런 성격으론 전국에서 유일하다.
/ 한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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