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명사전, ‘후즈 후 인더월드’(마르키스 후즈 후 출판사)에 청주대학교 경제통상학부 이현재 교수(47)가 등재돼 학교와 지역사회를 고무시키고 있다.
‘후즈 후 인더월드’는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예술계등에서 공헌도 높은 인물을 골라 수록하는 100여년 전통의 권위있는 세계인명사전으로 세계 200여국, 7만여명의 유명인사의 이름과 약력,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교수의 이러한 성과는 작년 10월 ‘21C를 이끌어갈 아시아 500인 인명사전’(바론즈 후즈후 출판사)에 등재된 이후 연이어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 기쁨은 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이를 지켜본 한 동료교수는 “작년에는 학과장, 올해는 대외협력실장등 보직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시간을 낼 수 없을 텐데, 이 교수는 시간을 내 세계 유수의 학술지에 논문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이런 성과를 얻었다”며 자신도 분발하겠다고 웃어보였다.
이교수는 평소 학생들에게 ‘뚜렷한 목표를 세우면 언젠가 꿈을 이룰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때문에 기자는 세계 4대 인명사전에 연이어 등재된 성과와 평소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다음과 같이 물었다.
“교수님은 평소 ‘후즈 후 인더월드’에 등재되는 것이 꿈이었습니까”
이에대해 이교수는 “‘후즈 후 인더월드’에 등재되는 것이 궁극적인 꿈은 아니다. 단지 꾸준히 노력한 것에 대한 성과일 뿐이다. 내가 평소 ‘투렷한 목표를 세우면 꿈을 이룰수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청주대학생들이 서울대학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대를 제외한 모든 대한민국 대학생들은 서울대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때문에 스스로 동굴을 만들고 동굴밖으로 나가려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포자기하는 학생들도 있다. 나 역시도 서울대 출신이 아니다. 평소 ‘나는 서울대 출신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서울대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미국에서 흑인인권운동이 스스로를 ‘블랙’(흑인)이 아닌 ‘니그로’(깜둥이)로 부르면서 부터 힘을 얻었다. 지방대 학생들은 ‘나는 서울대생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목표를 설정하면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유학준비기간 지겨운 10년

이교수는 친구들로 부터 ‘아직도 유학을 안 갔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학준비 기간이 길었다. 뿐만 아니라 여동생이 ‘너네 오빠 아직도 유학 안갔니’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이는 이교수가 서울대 콤플렉스 뿐만아니라 장남콤플렉스도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외아들로서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남들처럼 빨리 유학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76년 ‘유학선언’부터 86년 유학을 떠날 때까지 10여년동안 유학가겠다는 말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이 질릴 만도 했을 것이다. 이교수는 말그대로 ‘목표를 세우면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다’를 몸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책속에 묻혀살던 유학생활

10년만의 준비기간 뒤에 미국으로 건너간 이 교수는 유타대와 위스콘신대학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고 우리로 말하면 대학교 강사 생활을 2년 정도 했다. 학생들 앞에서 강의할 때는 ‘이코노믹’의 발음을 알아들지 못하는 학생들 때문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군대에서 연락장교를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영어에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던 그 였지만 미국에서는 학생들과 교수들을 언어의 공황상태로 빠뜨리기 일쑤였다. 이러한 언어적 문제와 풍습차이로 타국생활의 신세타령을 할라치면 오히려 친구로부터 ‘이 땅에 뼈를 묻겠다’며 친구의 한탄과 각오를 들어야했다. 기숙사의 문이 닫힌 밤에는 눈을 뭉쳐 창에 던져 동료를 불러서 창문을 통해 의문점을 서로 푸는등 타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치열했다.
어려운 시절이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는데 이교수는 유학시절을 정말로 그리워 하고 있다. 그 시절엔 세계적인 석학 모센 바마니 모스쿠이 교수의 사사를 받으며 수많은 논문 작업을 같이 했다. 이교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발췌, 선별, 자료수집 능력에서 다른 학생들에 비해 뛰어난 성과를 보여 주었다. 이들의 논문은 연구 아이템이 샘솟듯 넘치는 지도교수와 바로 바로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 검증하는 이교수의 찰떡궁합으로 세계 유수 학술지에 수많은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교수가 한국에 돌아와서 근 2년 간은 고향인 한국에서 오히려 미국에 대한 향수병이 들 정도로 그 시절은 연구하기에 좋은 시절이었다. 이교수는 그 시절을 ‘지도교수와 내가 탁구공을 맞받아 치듯 연구하던 시절’이라며 향수에 젖어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일단은 연구보다 중요한 인간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고 교수로서 연구를 하면서도 보직을 맡아 학내업무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또한 기초학문이 미국에 비해 열악한 상황이기 때문에 연구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교수는 “자기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맘껏 연구하고 싶다. 연구자료가 부족한 건 문제되지 않는다”며 하소연하듯 자신의 위치에 대해 말했다. 그래도 ‘후즈 후 인더월드’에 등재되는 성과를 얻었으니 이는 엄살인 것으로 판단된다.

외국에 더 알려진 이교수

한국에서 ‘후즈 후 인더월드’등 세계4대 인명사전에 등재된 인사들중 국내보다 외국에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공통점은 교육의 수도, 서울대 출신이 아니며 교육의 변방 지방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교수도 예외는 아니다. 이교수 논문의 경우 다른 논문에 인용되는 예가 많아 평가가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국내보다는 오히려 외국에서의 평가가 높다.
현재까지 발표된 이교수의 논문은 30여편, 그중 20여편이 국제학술지에 발표되었고 ‘생산성이 국가 환율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와 ‘개방경제 내에서의 화폐수요함수 측정’이 ‘후즈 후 인더월드’에 평가 논문이 되어 그 공헌도를 인정받은 것이다.
‘후즈 후 인더월드’를 펴내는 ‘마르키스 후즈후 출판사’에서는 ‘귀하의 왕성한 학술활동과 귀하가 이룬 연구업적들의 탁월성을 인정 등재키로 했다’고 그에게 알렸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오히려 아쉬움을 남긴다.
이교수는 외국과 국내에서의 반응에 대해 “국내보다는 외국에서의 반응이 더 좋은 것 같다”며 논문의 체감인정도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교수는 “세계유수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할 경우 서울의 한 대학은 지방대와 연구비 면에서 10배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연구에 대한 투자가 없는 것은 지방대 스스로 교육의 변방으로 걸어가는 결과”라고 말했다. 이는 지방대 위기에 대한 이교수의 아쉬움섞인 진단으로 판단 된다.
이러한 아쉬움이 하루 속히 해결되기를 바라며 이교수의 성과가 청주대학교는 물론 많은 지역대학교의 자세를 변화시키길 바란다.
/곽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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