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순 원 시인·청주대 강사

   
나는 문학을 공부하면서, 시는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이 쓰는 것이고, 수필은 인생에 성공한 사람들이 쓰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인생에 실패한 사람이 쓴 수필을 누가 읽겠는가. 나름대로 인생에 성공한 사람이라야 솔직하고 친밀하게 그러면서도 지혜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는 다르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잘 사는 사람이 무엇이 답답해서 시를 쓰겠는가. 시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나 가장 꼭대기에 있다. 또는 그 양극단을 오간다. 평범한 눈, 일상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특별한 곳을 보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고독하고 쓸쓸하다. 격렬하고 무례하다. 이 세상에 발들 디디지 못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는 시인은 불온하고 위험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아는 몇몇 시인은 약속을 잘 안지키고 무척 뻔뻔스럽고, 포즈에 익숙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시는 홍시와 같고 수필은 곶감과 같다. 홍시가 발갛게 달아오른 욕망이라면 자칫 그 욕망이 농익어 터질 수 있는 것이라면, 곶감은 미리 따서 껍질을 벗겨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도록 잘 말려놓은 것이다. 지혜로운 것이다. 감에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떫거나 비린 맛도 마르면서 서서히 삭고, 먹을 때 과즙이 묻어나지 않도록 검게 잘 말린 것이다. 검게 말랐지만 감이 본래 가지고 있던 주홍빛도 살짝 감추고 있는 것이다.

나는 청주가 수필이 되기를 바란다. 격렬하고 무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머와 위트가 있었으면 좋겠다. 요란하거나 유난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혜로웠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잘 정리되어 있으면서, 아름답기를 바란다. 나라 안이나 밖에 있는 이름난 도시들을 참조는 하되 따라가려고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경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암산은 해발 338m로 청주의 진산이다. 청주대 후문에서 한 시간 남짓 오르면 정상에 다다를 수 있고, 삼일공원 쪽이나 향교 쪽 청주 시내 어디서라도 두 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청주 사람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오기도, 잘 알기도 힘든 산이다.

그래도 20여 개의 사찰이 있고, 용바위에서는 암벽등반을 할 수도 있다. 세상의 이름에 현혹되지 않고,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산이다. 우암산 순환도로는 잘 정리되어 있어 편안하면서도, 아름답다. 이 도로에서 과속해서 사고가 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우암산은 이미 수필이다.

청주 시내를 가로지르는 무심천은 까치내로 흘러간다. 도종환 시인은 “욕심을 다 버린 뒤/저녁 하늘처럼 넓어진 마음”을 ‘무심’이라고 했다(「무심천」). ‘저녁 하늘’은 넓기도 하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시인도 넓은 마음에 아름다운 마음을 겹쳐놓고 싶어서 ‘저녁 하늘’이라고 했을 것이다.

예전에 무심천은 수량도 적고 수질도 썩 좋지 않았다. 아주 예전에는 청주 시내의 하수를 받아내는 역할에 머물렀을 뿐,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흘러가는 개천에 불과했다. 요새 무심천을 보고 있으면, 청계천을 가지고 유난을 떠는 서울 사람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지나치게 정략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무심천에 새들이 다시 날아오고 여러 종의 물고기가 살기까지에도 만만치 않은 곡절이 있었겠지만, 청계천이 겪어낸 유난스런 행사에 비하면 말 그대로 무심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요새 새로 진행되는 한강 프로젝트에 비하면 유머러스한 수준이다.

피천득 선생님은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비단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수필」). 나는 청주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않고 속박을 벗어나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고 산뜻”하게 되기를 바란다.

세상의 이목을 끌기 위해 번잡한 일을 꾸미지 않고, 자꾸 무엇을 내세워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늘 깨끗하고, 조그만 문화재 하나라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흐트러진 곳을 조금씩 바로잡아 나가면, 세상의 존경을 받는 성공한 도시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밖에 대고 경위를 따져가며 자분자분 말도 하고, 외롭고 쓸쓸한 시인이 무례하고 뻔뻔하게 굴러들어 불온하고 위험한 상상에 몰두해도 여유 있게 포용 할 수 있는 도시가 되기를 바란다. 곶감처럼 지혜로운 도시가 되기를 바란다. 떫고 비린 맛을 잘 삭여내고, 주홍빛을 살짝 감추고 있는 도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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