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건 국정원장 작년 10월 비공개 브리핑서 밝혀… 남북관계-인터넷 발전 영향

마치 이 땅에는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국기독교총연맹(한기총)이 주최한 제2차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가 19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자유이다.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대부분 대형버스를 타고 왔으며, ‘미군철수 반대’ ‘반미 반대’ 같은 구호를 피켓과 교구를 나타내는 피켓을 들고 자리를 지켰다. 이들의 구호와 피켓을 탓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날 집회는 ‘평화기도회’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 이날 ‘한기총 시청앞 집회 반대 기독인모임’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한기총의 기도회에 반대하는 항의시위를 했으나, 주위에 있던 50~60대 기도회 참석자들은 이들의 피켓을 빼앗고 멱살을 잡고 때리는 등 항의시위를 원천 봉쇄하려 했다.
이처럼 비평화적인 정치집회를 평화기도회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우스꽝스런 ‘언행 불일치’도 문제이지만, 백주 대낮에 5만명이나 되는 인파가 모인 시끌벅적한 광장에서 기도(祈禱)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기독교인의 자세인지도 의문이다. 다만 기독교인의 자세에 대해 논하는 것은 여기서 접어두기로 하자.

김홍도 목사 “공산주의가
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문제는 지난 1차 기도회에 이어 ‘주한미군 철수 반대 기도’를 한 김홍도 목사의 ‘세속’에 대한 발언 내용이다. 김 목사는 설교에서 “고칠 수 없는 미치광이 병인 공산주의가 한국에 염병처럼 퍼지고 있다”며 “두 여중생이 죽은 것을 두고 반미감정을 부추기고 성조기를 불태우며 주한미군 철수하라고 외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근거로 ‘고정 간첩’을 내세웠다. 다시 말해 ‘고정 간첩들에 의한 책동으로 반미 촛불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논리다.
이같은 주장은 80년 5월 광주시민들의 민주화투쟁을 북한의 고첩과 불순세력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만행으로 몰아간 이른바 신군부의 선전선동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주장은 또 90년대 초반에 노동자, 학생들이 연이어 죽음으로 항거하는 분신정국이 벌어지자 이들의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한 박홍 신부를 연상케 한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김 목사는 다만 “북은 그간 우리나라에 수많은 고정간첩을 내려 보내왔다”며 “현재도 5만 명이 넘는 고정간첩이 있으며 친북사상을 가진 자들은 400만 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이 기도회에도 고정간첩이 와 있을 것”이라며 “(그 간첩은) 회개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신도들이 박수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가히 수준급 블랙 코미디이다.

고첩 4∼5만명은 냉전시대 셈법

고정간첩 5만명설이 나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현직 국방부 장관이 ‘우리나라에 간첩이 4만 명이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박홍 전 서강대 총장도 비슷한 주장을 해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도 국내 불순분자의 수가 그 정도 된다고 거들었다. 그리고 성균관대학의 L교수는 이것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생하는 등록되지 않은 전파는 하루에 1만여 회 이상이라고 한다. 한 개 전파에 4~5명의 간첩이 물려 있다면 4~5만명이 된다는 얘기이다. 우리나라 성인인구가 2500만명이라고 하면, 1000명 중에 2명이 간첩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냉전시대의 간첩 머릿수 셈법이다.
북한의 이른바 대남공작 추세를 보면 지난 7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직접 보낸 간첩이나 조총련계 간첩들이 많았다. 그러나 외화난이 심각해지고 조총련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진 80년대 이후에는 직파간첩이나 우회침투간첩을 잡았다는 소식은 별로 없다.
게다가 89년 이후에는, 간첩활동의 터전이었던 조총련이 북한의 자금 지원이 끊어지고 동포들의 모국방문 성과로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오히려 북한은 외화가 거덜나고 김정일 생일이다 해서 조총련으로부터 돈을 걷어가고 있다. 그리고 조총련을 이끌던 세대들도 간첩 활동을 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

“북한 당국 고첩 자금지원 전면동결”

이런 형편 때문에 적극적인 대남공작은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직접 침투하여 사보타지나 테러를 하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에 의한 정보수집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 정보기관의 판단이다. 심지어 북한의 공작기관이 마약을 팔고 교포들로부터 돈을 구걸해 가는 것으로 ‘업종을 바꾼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갈 정도이다. 고전적인 잣대로 보자면,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로 대남공작의 호기를 맞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작자금이 달려 대남공작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필자의 가설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가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가 언론인들에게 비보도를 전제로 밝힌 내용이다.
신건 국정원장은 지난 10월 21일 종합일간지·방송사 사회부장단을 국정원으로 초청해 가진 북한정세 브리핑에서 비보도를 전제로 “북한 당국이 남한에 있는 고정간첩들에 대한 자금지원을 전면 동결했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 꿰뚫고 있는 국가정보원 최고책임자의 이같은 발언은 한나라당이 제기한 ‘대북 현금지원설’과 관계없이 그동안 막연히 제기돼온 북한 당국의 외국 원조자금 군비 전용설을 부인하는 것이다. 대남공작의 최일선인 고정간첩에 대한 자금지원을 전면 동결한 마당에 군비 전용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신건 원장 “남북관계 및 인터넷
발전이 그 배경”

한편 신건 원장의 고정간첩 자금지원 전면 동결 발언은 이날 브리핑에 참석한 한 신문사 사회부장이 “남북관계가 진전되면서 국정원이 고유업무인 간첩 잡는 일을 사실상 포기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참석한 언론인과 국정원 소식통에 따르면, 신 원장은 이 질문에 “간첩을 안잡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간첩활동을 하는 현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어서 못잡는 것이다”고 답변했다.
신건 원장은 이처럼 간첩활동을 하는 현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1차적 배경에 대해서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관계가 급진전을 보이면서 북한 당국이 남한에 있는 고정간첩들에게 자금 지원을 전면 동결했다”면서 “남한의 고정간첩들이 입수하는 첩보 수준이 너무 조악해서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신 원장은 또 “직접 북한 고위층 관계자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북한이 청와대를 비롯해 우리 정부 부처니 주요기관의 동향을 알려면 고정간첩을 활용하는 것보다 인터넷을 통해 주요 정부기관의 홈페이지를 검색하는 편이 훨씬 더 유용하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같은 발언을 종합하면 남북 정상회담 이후 진전된 남북 교류협력관계와 발전된 한국의 인터넷 환경이 결과적으로 북한 당국의 대남공작 활동을 중단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실제로 신건 원장은 “대학가에서 김일성 찬양 구호를 벽에 적는 일은 이제 화제거리도 못 된다”면서 “그만큼 남북관계가 급변하고 있는데 단순한 선동이나 하는 고정간첩들을 어디에 쓸데가 있겠느냐”고 반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생활·의식 수준 높아져
간첩 침투 토양 사라져

간첩수사는 대부분 신고를 통해 시작되는데 90년대에 들어 신고 건수가 매년 30%씩 줄어들어 신고에 의한 수사착수 건수는 1년에 10건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대공수사관들은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약해졌다”고 말하지만, 국민 생활 및 의식수준이 높아져 간첩이 침투할 토양이 점점 없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래 북한정세 브리핑 자체가 비보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나 초청에서 제외된 일부 언론사 부장들이 브리핑 내용을 취재해 자사에 정보 보고하는 과정에서 브리핑 내용이 노출된 것이다. 이종찬 전 원장도 국정원장 퇴임 직후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 당국이 경제난으로 대남공작을 사실상 중단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신건 원장의 발언은 구체적인 배경설명과 함께 그보다 ‘한 발’ 더 나간 것이다.
국정원은 지난번 국정감사에서 현대상선 대북 비밀지원 국정원 개입설과 국정원 일부 간부들의 정형근 의원 폭로 연계설 등이 제기되자 언론이 이런 의혹설에 현혹되지 않도록 해명하기 위해 이와 같은 언론 브리핑을 마련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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