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구공원서 독립만세… 외탄 야경에 ‘흠뻑’

▲ 상해 마당로엔 허름한 주택가 골목 사이로 한민족의 맥을 이어준 상해 임시정부가 자리하고 있다. 상해 번화가 마당로. 오래된 주택가 사이로 3층짜리 낡은 벽돌집을 볼 수 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이국 만리타향에서 고군분투하며 한민족의 맥을 이어준 상해 임시정부가 27년의 역사 중 13년을 청사로 사용했던 곳이다. 1932년 윤봉길의사 의거가 있기까지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사였다. 철거의 위기도 여러 번, 한·중 수교 후 우리나라의 요청으로 남게 된 이후 1992년 새롭게 단장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이 중국 상해 인민정부에 의해 유적지로 관리되고 있다. 입장권을 사면(15원), 임시정부의 연혁에 대한 영상물과 요인숙소로 이용되던 3층 전시관까지 관람 가능한 곳. 아무리 망명정부라 해도 한 나라의 정부 청사가 너무 초라한 듯해 잠시 숙연한 기분만저 들었다. 청주 사직동에서 온 강영자 할머니(66)는 전시된 밀랍인형을 보며 그때의 독립투사가 살아오기나 한 듯 “수고 많으십니다”란 인사말을 연신 건넸다. ‘중국인민 100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청년영웅 윤봉길이 했다’는 의거비가 홍구공원 입구부터 관광객을 맞고 있다. 인공호수를 바라보는 ‘의거비’를 지나 공원에 들어서면 ‘윤봉길 의거현장’을 기려 한국건축양식으로 지은 2층짜리 정자를 볼 수 있다. 윤 의사의 호 ‘매헌’을 따서 이름도 매정(梅停)이라 불린다. 1932년 4월29일 상해사변 전승축하기념으로 이곳을 찾은 일본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거물 외교관 20여명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응징한 ‘의거현장’을 기린 기념관이다. 이곳에선 윤 의사의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집을 떠나기 전 남긴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란 글귀는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안타까운 것은 일찍이 추모 사업에 뛰어들지 못해 노신의 묘와 기념관이 자리한 ‘노신공원’으로 작금에 기억되고 있는 점. 가슴 뭉클한 역사의 현장도 잠시. 어른들의 가슴 뭉클한 ‘독립 만세’소리를 뒤로 하고 중국 효 문화 탐방 마지막 날 밤을 보내기 위해 상해 외탄을 찾았다.외탄은 황포강 제방과 중산동로 사이에 있는 상해 시민의 휴식처. 동쪽으론 황포강을 접한 채 상해의 상징 동방명주탑과 마주하고 서쪽으론 상해시 인민 청사를 비롯한 대형 빌딩이 늘어서 있다. 상해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최근에는 야경을 즐기기 위해 많은 연인과 관광객이 붐비는 곳이라 한다. 특히 이곳은 1840년 아편전쟁으로 상해가 개방된 이후 외국인이 직접 치안을 담당하는 조계(특별구역)가 있던 곳으로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소련 등 열강의 다양한 건축양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전체 길이 1.7km, 유럽풍 도시가 오색찬란한 야경을 뽐내니 황포강을 유영하는 유람선 선상위엔 어느덧 ‘효’문화 탐방 어른들의 구성진 노래 가락이 울려 퍼졌다. “상해가 용이라면 동방명주는 여의주에 해당한다. 마치 용모가 하늘에서 내려앉은 밝은 기둥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88m 하이야트 호텔 건물과 함께 상해의 상징이 되고 있다”고 현지 가이드는 전했다.격동의 한국사 남 다른 ‘감회’상해 임시정부 찾은 남도희 할아버지 ▲ 남도희 할아버지
20대 초반 일본군에 징집되어 태평양전쟁(만주사변)과 한국전쟁(6.25) 등 격동의 한국사를 살아온 남도희 할아버지(81). 남 할아버지에겐 이번 중국여행이 남다른 감회로 밀려온다. ‘어르신 공경 효 문화 탐방’에 초청된 몇 안 되는 어른으로 일본군에 징집돼 중·일 전쟁의 총알받이로 참전한지 60여년 만에 중국 상해를 다시 밟았다.

남 할아버지는 당시 중대 간 통신연락병을 했다. 일본이 전선에서 밀리고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양자강 유역을 따라 상해에 입성한 뒤 평안도 출신 장교들과 광복군에 몸담기까지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힘든 시기를 떠올렸다. “일본이 패하고(45년 8월15일) 선상에서 ‘조국에 먼저 돌아가 부르겠다’며 손을 흔들던 김구 선생이 눈에 선하다”고 그 때를 회상하던 남 할아버지. 상해 임시정부와 홍구공원 앞에선 끝내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50년 6월25일) 남 할아버지는 “제주 하사관 학교(육군 훈련소)를 거쳐 국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남 할아버지는 “격동의 세월 한국인으로 사는 것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과의 쉼 없는 싸움이었다”고 말했다. ‘광복군 별동 소대장을 했었다’는 남 할아버지. 김구 선생에 대해 “눈매에 힘이 넘쳤지만 자상한 분이었다. 그런 분이 우리나라를 다스렸으면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쉽다”고 전했다.

남 할아버지는 40여년 간 전매청(현 한국담배인삼공사)에 몸담고 외길인생을 살아 왔다. 이런 공로가 인정돼 정부로부터 ‘녹조근조훈장’을 받기도 했다. 벌써 20년째 청주체육관 인근에서 ‘커피 봉사’를 하고 있는 남 할아버지. 테니스 동호인과 환경미화원들에겐 따뜻한 ‘커피배달 아저씨’로 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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