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탑 고공농성·사장실·충북도청 옥상 점거 불구 묵묵부답
하이스코 전원 고용 선례 불구 ‘자본 VS 노동’ 대리전 배수진

‘정규직은 가족이고 비정규직은 가축인가?’
하이닉스 사내하청지회 소속 조합원들의 포스터와 시위용 피켓에 실린 문구다. 2004년 10월 사내하청지회가 설립된 뒤 두달만에 쟁의조정 결렬, 전면파업, 직장폐쇄가 단행됐고 지금까지 조합원들의 메아리 없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20개월에 가까운 하이닉스 정문앞 천막농성을 비롯해 본사 상경투쟁, 송전탑 고공농성, 하이닉스 사장실 점거와 충북도청 옥상을 기습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충북도 노사정위원회와 39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나서 중재위원회를 구성해 수십차례 양측을 접촉해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마저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하이닉스 사태는 충북도청 옥상 점거시위자 12명 전원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을 비롯해 각종 고소고발과 하청지회 지도부가 사법처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이닉스 입장에서도 대외적 이미지 실추와 정문 앞 농성으로 인한 업무 차질 등 경제적 손실까지 발생하는 등 양측에 상처만 남기고 있다.

하청지회는 노동조합 인정과 하이닉스의 직접고용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하이닉스는 교섭당사자가 아니라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어 사태는 한발자국도 진전되지 않고 있다.

하이닉스와 마찬가지로 사내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조합과의 심각한 분규가 발생했던 현대하이스코 순천공장이 1년여 만에 하청지회 소속 조합원 108을 전원 복직키로 협력업체와 하청지회가 협상을 타결한 선례에도 불구하고 하이닉스의 굳게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 지난 7월 정우택지사가 취임직후 우의제 사장을 만났지만 하이닉스는 교섭당사자가 아니라는 입장만 고수하고 있다.
/사진=육성준기자
‘고용 절대불가 차라리 돈으로 해결’

하이닉스반도체의 지난해 순이익은 1조8000억원. 청주공장에만 4000여명의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하청지회 소속 조합원 120여명을 고용하는 것은 경영 측면에서만 보면 결코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이들은 회사 내에서 각종 업무를 수행했고 이들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이닉스가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협상을 하는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경영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은 하이닉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중재위가 양측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던 지난 봄, 하이닉스의 위로금 얘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회사측이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힌 것은 아니지만 사태를 바라보는 하이닉스의 시각을 충분히 읽을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청지회의 사측은 하이닉스가 아니라 협력업체다. 따라서 이들은 하이닉스 비정규직원이 아니라 협력업체의 정규직원이다. 남의 회사 노조와 협상하는 것은 불법이고 당사자도 아니다’라는 일관된 주장의 연장에서 ‘어쨋든 직장을 잃고 고생했으니 약간의 위로금은 지급할 수 있다’는 쪽으로 약간 선회한 것이다.

위로금 얘기가 일부 언론과 하청지회, 민주노총 측에도 전해지면서 양측의 감정적 앙금은 더욱 깊어갔고 중재위 마저 사실상 활동을 중단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민주노총 절대 수용불가
사용자가 아니라는 하이닉스의 입장 이면에는 노동계에 대한 원초적인 알러지가 깔려 있는 게 사실이다. 안으로는 한국노총 소속인 자사 노동조합을 무시할 수 없고 밖으로는 재계의 눈치를 민감하게 살필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노동현안으로 부각시키면서 재계는 내심 적잖이 긴장하고 있다. 협력업체라는 이름으로 시설유지나 운반 등 비전문분야의 업무를 아웃소싱하고 있으며 계약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노동계가 최대 현안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들고 나올때부터 재계의 단결(?) 분위기가 묵시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하이닉스가 하청지회의 직접 고용 요구를 수용할 경우 그 파장은 거의 모든 대기업에 미치게 될 것이다. 사내 협력업체 제도를 운영하지 않은 기업이 거의 없고 이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정규직화를 요구한다면 분규 수준을 넘어 재계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 등 노동계에서도 조합원들의 생존권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하이닉스를 타깃 사업장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같은 재계의 입장은 하이닉스 과장급 직원으로 부터도 확인되고 있다.
이 직원은 “사실 협력업체(비정규직) 비율은 하이닉스 보다 청주에 위치한 A사가 훨씬 높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유독 하이닉스만을 문제삼고 있는데 A사 노조가 민주노총 소속이기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를 들고 나오지 않은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하이닉스는 물론 재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하이닉스 하청지회 문제가 아니라 민주노총과의 싸움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관계자는 “비정규직 투쟁을 위해 하이닉스 하청지회 조합원을 이용한다는 주장은 순수한 노동운동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는 음모다. 2년 가까이 월급한푼 못받고 파탄지경에 이른 조합원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고 반박했다.

하이닉스 닮은꼴  하이스코 해법은 반대
분규 1년만에 전원고용 노조활동 보장 합의

지난 5월 현대 하이스코 순천공장은 비정규직지회와 해고자 전원복직, 손배소 고소고발 취하, 노조활동 인정을 합의해 1년여의 분규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이스코 분규도 지난해 6월 하청회사 노동자들이 노조(비정규직지회)를 결성하자 해고되면서 시작됐다.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현대차그룹 본사 신축사옥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점도 하이닉스와 비슷하다. 또한 두 사업장 모두 지자체와 시민단체들이 중재에 나서는 등 하이닉스와 닮은꼴 과정을 거쳤다.
거의 비슷한 과정을 겪은 두 사업장은 하지만 선택한 해법은 크게 달랐다.

하이닉스가 사용자가 아니라며 대화 자체를 거부한 것과는 달리 하이스코는 원청이 직접 나서 전원복직과 노조활동 보장이라는 결실을 일궈낸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순천시장의 적극적인 중재노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지역 차원의 접근법이 통한 선례로 기록되고 있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하이스코 분규 타결 배경에 대한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지역과 원청이 나서 합의했다는 데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하이닉스 문제에 액면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본구조가 다르고 매그나칩반도체라는 변수도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스코를 선례로 지역적 해법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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