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년대, 목포상고, 강릉상고와 함께 ‘10대 상업고’
금융·경제인 배출의 산실에서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지난 4일 찾아간 대성고등학교는 명문고로 거듭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상기된 분위기였다. 연일 이어지는 언론보도와 지역사회의 관심에 구성원들은 이미 명문고의 반열에 오른 듯 들떠있었다. 대성고 박원규 교장은 “선배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내부혁신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 인문계고교로 전환한 2002년에는 대성고 진학을 원했던 학생들이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그동안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믿음을 심어줬고, 이번 정봉규 회장의 장학금 기부를 계기로 도약의 발판을 만들 수 있게 됐다”며 자신에 찬 모습이었다.

올해로 개교 71주년, 1935년 청주상업학교로 개교한 대성고는 전신인 청주상업고등학교 시절 수많은 정·제계 인사를 배출하며 청주고등학교와 더불어 충북을 대표하는 1세대 명문고였다. 1951년 학제 개편에 따라 5년제로 운영되던 청주상업학교는 청주상업고등학교와 대성중으로 분리됐고, 이후 30여년 간 내로라는 걸출한 인사들을 배출했다. 김현수 전 청주시장과 윤석민 전 국회의원 김현배 전 국회의원 등 정계인사를 비롯, 주택은행장과 건설부차관을 지낸 이관영, 전 충북은행장 황창익, 전 외환은행 전무 김재학, 전 서울은행 상무 장석원 등 수많은 금융계 인사를 배출했다.

또한 박노수, 윤형근, 이서지, 정해일 등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와 정기동, 최순호, 이운재 등 유명축구선수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이생명 다하도록’, ‘현해탄은 알고 있다’, ‘아낌없이 주련다’, ‘남과 북’ 등 수백편의 극본을 쓰며, 우리나라 극작가의 대부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운사 옹(84세·3회졸업·본명 한간남)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청주상고 졸업생이다.

청주상고 동문이면서 31년간 모교에 몸담고 있는 박원규 교장은 “모집단위가 전국이었던 초창기 청주상고는 전국에서 내노라는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10:1이상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고 목포상고·강릉상고와 더불어 전국 10대 상업고에 포함될 정도로 상업고 가운데 최고의 명문이었다”고 회상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만 해도 청주상고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당시 최고의 직업으로 꼽히던 은행원이 되기 위해 찾아온 우수한 인재들로 넘쳐났다. 졸업생 여섯 중 하나는 은행원이 됐고, 충북지역 은행원 절반이 청주상고 출신이었을 정도로 청주상고는 금융인 배출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청주상고의 춘삼월 호시절도 갔다. 직업으로써 은행원의 인기가 물러나고 대학의 수가 늘어 대학진학이 수월해지자, ‘인문계고 선호 실업계고 기피현상’이 일었다.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 또한 청주상고에는 악재로 작용했다. 하나뿐인 자식을 실업고에 보낼 수 없다는 부모들의 교육열(?)도 청주상고의 몰락을 부채질했다. 중학교 성적 상위 70%까지는 인문계 학교로 진학하고 하위 30% 가운데 입학생을 선발해야 하는 현실에서 우수학생 유치는 불가능했다. 급기야 1990년대 말에는 미달사태까지 벌어져 학생을 유치하기위해 교사들이 중학교를 찾아 다녀야하는 딱한 형편에 처했다.

1935년 지어진 청주상고 본관건물이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등재되는 것과 함께 청주상고의 명성도 동문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 청주 대성고 전경. 사진=육성준기자
21명 동문 교사, “구조조정 되더라도 학교 살려야”

2001년 당시 청주상고 교감으로 근무했던 박 교장은 “몰락한 청주상고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문학교 전환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문학교 전환도 그리 녹록치 않았다. 교육부 승인도 승인이지만 2만여 동문의 반발은 그보다 더 거셌다. 일제치하 10년, 한국전쟁 등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65년간 면면히 이어오던 모교의 명판을 내린다는 결정에 동문들은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또한 학과과정으로 인해 인문계 전환 시 상과·전산과 교사 21명 가운데 18명이 실직을 겪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공립도 아닌 사립학교에서 18명의 교사는 달리 오갈 데가 없었다. 이러한 악조건에서 동문들의 힘은 더욱 빛났다.

인문학교로 전환을 반대하던 동문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모교가 사라지는 것보다 옛 영광을 되찾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모교의 발전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또한 21명의 교사들도 기꺼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박 교장은 “무엇보다도 모교 재직 선생님들의 합의가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우리가 구조조정이 되어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인문계로 개편해야 청주상고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며 기꺼이 한마음이 됐다”고 말했다. 이 또한 21명의 교사 대부분이 청주상고 동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2년 청주대성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첫 입학생을 받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실업계 고등학교라는 인식이 바뀌지 않았고 신생학교는 최신시설이라는 장점이라도 있었지만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랜 역사와 그동안 배출한 동문들 뿐이었다”고 박 교장은 말했다.

최근 11대 동문회장이 된 정봉규 회장의 30억 기부는 학생들이 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재학생들은 선배가 그늘이 되어주기도, 비를 막아주기도 한다는 사실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 온몸에 힘이 들어간 눈치다. 이에 질세라 재단에서도 우수학생 유치를 위해 1937년 지어진 강당을 부수고 그 자리에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를 짓겠다고 나섰다. 박 교장은 “장학금 기부로 학교가 활력을 얻었다. 인문계 전환 원년에는 학생유치가 어려워 고생했지만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이제 정상궤도에 올라섰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사립학교의 본연의 목적인 우수인재 양성에 매진할 것이다”고 밝혔다.

대성고는 2005년 처음 인문계 졸업생을 배출했다. 2006년에는 명문고 구분의 척도처럼 된 서울대 입학생 수가 5명으로, 세광고·충주고·신흥고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자녀의 대성고 입학을 꺼려하던 학부모들도 전교생 휴대폰 휴대금지 등 엄격한 학내 질서유지와 면학분위기 등이 알려지면서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재학당시 학생회장을 맡았던 정우철씨(39회 졸업생)는 자신의 딸 또한 대성고에 입학시켰다. “청주로 이사 오면서 집과 가까운 학교에 딸아이를 진학시킬 수 있었지만 모교인 대성고에 입학시켰다. 2학년에 재학 중인 딸이나 나 모두 대성고를 선택한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예전에 내가 학교를 다닐 때보다 선생님들이 더 열성적인 것 같다. 딸과 고등학교 동문이 됐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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