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 우물터를 두고 촌락이 형성되던 시절

우물터는 휴식처이자 사교장이며 교육장
지하수 펌프가 개발되면서 우물물은 허드렛물로 전락


진달래 꽃 피고 지는 산골 마을의 앳된 소녀가 옹달샘에서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양철 물통 두 개에 물을 가득 담아서 찰랑찰랑 물이 넘칠 것 같은 아슬함속에서도 물지개만 흔들리고 물은 전혀 넘치지 않는 소녀의 걸음새가 참 신기하다.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밥 짓는 것이 늦었는지 카메라 앞이 수줍어 고개를 떨구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소녀의 표정은 옹달샘처럼 맑고 고왔다.

▲ 샘 터의 아이들 학교에서 돌아온 여자아이들이 저녁밥 지을 물을 길러 공동 샘터로 나왔다. 어린 꼬마는 언니를 다라 나왔지만 세월이 지나면 언니들처럼 물지게를 지고 가는 일이 반복됐다. / 1978년 청원군 문의 텃골 시골에서 낳고 자란 소녀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물긷는 것까지 하며 농사일로 바쁜 어머니의 일손을 많이 덜어주고 어릴 적부터 배운 살림솜씨로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다. 그녀들은 학교 공부에다 어린 동생까지 돌보면서 밭일 나간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힘든 집안일도 척척 잘해냈다. 우리나라 풍속에 결혼해서 첫딸을 낳으면 살림 밑천이라고 하는 것도 일찍 낳은 첫딸이 자라면서 어머니를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여자아이들은 자라면서 엄마를 닮아가고 엄마에게 배운 살림 솜씨가 시집으로 이어져 다시 한 가정의 어머니로 정착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어머니들은 딸들과 열심히 어려운 살림을 이끌어 나갔다. 우리나라 고유의 여인상이 수줍고 다소곳한 이유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가정의 지어미가 되는 덕목까지 꼼꼼히 배우며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 펌프물 공동우물이 오염되어 수인성 전염병이 발생하자 농촌 가가호호 쇠파이프를 땅속깊이 묻고 손으로 작동하는 펌프시설로 생활용수를 사용했다. 공동샘은 빨래하는 허드렛물로 이용됐다. / 1982년 제천시 한수면
여인들의 손길은 물긷는 것 하나도 정성이 들어갔다. 양철(함석) 물통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물동이와 자배기에 물을 담았는데 이동할 때는 바가지를 엎어 또아리를 받치고 머리에 이어 물을 날랐다. 물을 워낙 소중히 여기는지라 물동이에서 한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기 위해 여인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

젊은 새댁이나 다 큰 처녀들은 물긷는 길에 아는 남정네와 마주쳐도 눈을 내려 뜨고 조심조심 발걸음만 재촉했다. 우리나라 여인들의 정숙함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샘터는 부지런한 아낙들의 물긷는 소리와 함께 아침이 찾아 왔다.

“빨간 태양을 가슴에 안고 / 사나이들의 잠이 길어진 아침에 / 샘터로 나오는 여인네들은 젖이 불었다 / 새파란 해협이 항시 귀에 젖는데 / 마을 여인네들은 물이 그리워 / 이른 아침이 되면 / 밤새 불은 유방에 빨간 태양을 안고 / 잎새들이 목욕한 물터로 나온다 / 샘은 사랑하던 시절의 어머니의 고향 / 일그러진 항아리를 들고 / 여인들은 샘터로 나온다 “

시인 조병화님의 샘터에 대한 글이다. 물은 모든 생명체의 원천이고 그 중 샘터는 자연으로부터 얻는 우리의 소중한 물이 담긴 소중하고 중요한 곳이다. 샘은 땅에서 물이 솟는 자리로 새암, 옹달샘 또는 시암터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인류는 선사시대 이전부터 샘물을 중히 여겨 신성시했고 청결하게 가꾸어왔다. 양지 바른 산 밑에 좋은 샘물이 솟아 오르는 곳에 한집 두집 마을 이루어면서 촌락이 형성됐고 샘물은 공동 우물터가 됐다. 공동 우물터는 아낙들이 물동이나 자배기들을 가지고 와서 물을 길어 가기도 하고 채소를 씻거나 더러 빨래를 하기도 했다.

▲ 허드레 우물터 부락에서 가장 깨끗한 샘물은 식수로 사용하고 그 밑으로 또하나의 우물을 파서 쌀을 씻거나 빨래 등을 하는 허드렛물로 사용했다. / 1978년 청원군 문의 암실부락 샘터에 동네 아낙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세상의 소문이나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오고 갔다. 심지어는 구체적으로 어떤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세세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회자되어 샘터에 앉아 아낙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동네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될 정도로 샘터의 정보는 신속하고 정확했다. 그래서 공동 우물터는 공동 작업장인 동시에 휴식처이고 사교장이며 세상 물정을 배워가는 교육장이 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충청북도는 삼국시대부터 좋은 샘들이 많아 많은 촌락들이 있었으며 사람들이 살기 좋은 여건을 두루 갖춰 중앙 정부에서도 중요시 여긴 지역으로 기록돼 있다. ▲ 두레박 우물터 양지바른 산밑에 땅속에서 샘물이 솟으면 그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다. 샘물은 우물터가 되고 공동샘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수가 됐다. / 1977년 청원군 문의면 형강
여러사람이 사용하는 공동 우물이 오염되어 수인성 전염병이 발생할 때나 정기적으로 봄 가을 두차례 힘 좋은 장정들이 동원되어 고인물을 다 퍼내고 청소를 깨끗이 한 뒤에 새로운 물을 받을 정도로 공동 우물터 위생 관리는 철저했다.

손으로 땅속의 지하수를 퍼 올릴 수 있는 작두샘 펌프가 개발되면서 집집마다 쇠파이프를 땅속에 박아 물을 퍼 올려 사용해 공동 샘터는 허드렛물로 빨래하는 빨래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이 흔해지니까 물의 소중함을 잊고 마구잡이로 공동 샘터는 훼손됐고 오염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물 오염은 아마 여기가 시발점 일 것이다. 그리고 수도가 보급되고 각종 용수의 사용으로 물의 오염은 심각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우리 조상들이 중요시하고 신성시한 샘터의 기억처럼 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생명의 원천인 물은 우리를 결국은 외면하고 말 것이다.
/ 前 언론인·프리랜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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