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대선보도, 조중동의 퇴락…객관성·사실성·공정성의 실종

이번 대선은 종이신문-방송-인터넷 등 신구미디어가 벌이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의 양문석 정책연구실장의 대선보도에 대한 평가와 변화하고 있는 언론지형을 두차례에 걸쳐 싣는다. 이 주제에 대한 독자와 학계의 ‘릴레이 참여’를 기대한다. <편집자>

목숨 건 듯한 치열한 선거전쟁은 끝이 났다. 각 정당과 후보들은 말 그대로 ‘목숨 건 한판’을 벌였고, 각자에게 돌아온 손익계산서를 빼 들고 또 다시 다가오는 총선전쟁을 대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의 전황을 전해주는 언론 특히 신문들은 ‘전달자’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전사의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전국토의 전쟁터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전사로서 언론? 언론의 기능을 ‘전달자’로 배우고 알아온 우리 국민들에게는 참으로 혼란스러운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언론들이 결코 전달자로 만족하지 못해 왔다는 점은 이제 상식이고, 지난 선거에서 주변의 예상과 틀리지 않게 우리나라 주요 신문들은 전사로서 톡톡히 한 몫씩을 했다.
여기서 언론들이 전사로 나섬으로써 포기했던 객관성과 공정성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다른’ 결과를 산출한 몇몇 신문과 그 신문들의 퇴조현상을 가속화시킨 요인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서 앞으로 한국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조심스럽게 모색해보고자 한다.

객관성은 없었다

2002년 12월.
한국 언론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한국언론들은 스스로 정론지이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정파지’임을 공개선언한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특정정당의 외곽 선전물이었다고 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100여 년 전, 미국에서 발행되던 대부분 신문은 정파지 또는 정당 기관지였다. 하지만 20세기 전후로 정파지들은 소위 말하는 ‘정론지’로 그 성격을 바꾼다. ‘당파성’보다 이윤창출이라는 ‘상업성’을 신문발행의 제1 가치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론지는 한국 언론의 기본 모델이 되었다. 그래서 어떤 신문이든지 창간 때 또는 창간기념일 때, 자신들의 신문을 ‘정론지’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한다.
정론지는 독자층을 특정정당의 당원으로 한정짓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여당과 야당 당원 및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보도하기 때문이다. 즉 정파지는 시장을 특정정당 당원으로 제한하지만, 정론지는 모든 사람들을 시장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정파지는 당파성이 보도의 일차적인 잣대라면, 정론지는 ‘상업성’이 보도의 제1 기준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기사. 상업성을 더 중요한 가치로 삼는 신문. 바로 이런 정론지는 자신의 상업성을 ‘객관성’이라는 용어로 덧칠하여 ‘바른 언론’으로서의 정론지인양 행세해 왔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정론지로 자칭하는 신문은 ‘객관성’을 스스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규범으로 간주하고, 또 이를 독자들에게 자랑하여 공신력을 확보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그렇다면 상업성을 가려주는 ‘객관성’은 과연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객관성은 사실성과 공정성으로 나눈다.
사실성은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뉴스가 될 만한 것’을 보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언론이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가?’, ‘언론이 보도한 내용이 뉴스로서 적절한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사실성이다.
그리고 공정성은 양적으로 균형이 잡혀있고, 질적으로 불편부당한 기사를 보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관련 당사자들의 입장을 양적으로 균형있게 보도하는가?’ ‘관련 당사자들의 입장을 왜곡하거나 특정인물이나 집단에게 유리하게 보도하지는 않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래서 객관성이 유지되고 있는 보도는 사실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고 있는 보도로 인정받게 되고, 언론은 이런 객관적 보도를 통해서 공신력을 확보하게 된다. 또 이런 공신력을 통해서 사회적인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각주-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관행적으로 객관성의 하위 개념으로써 공정성을 이해하기보다는, 객관성의 병렬관계로서 공정성을 사용한다. 즉 공정성과 사실성을 객관성의 하위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객관성을 사실성과 같은 의미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론비평진영에서는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할 언론이…’ 등으로 언론의 보도내용을 비판한다. 결국 객관성의 하위 개념으로서 사실성과 공정성을 두든지, 객관성을 사실성으로 대체함으로써 객관성과 공정성을 병렬관계로 두든지 상관없이, 객관성과 공정성은 한국 언론의 보도태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또한 언론인들이 기사를 작성하고 보도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덕율’ 즉 규범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선거보도에서 유난히 중요한 저널리즘 규범이 객관성과 공정성이다. 한데 우리 언론 특히 신문들은 저널리즘의 규범보다는 ‘특정후보 대통령 만들기’ 또는 ‘특정후보 떨어뜨리기’가 더 중요한 보도기준이었다.

사실성도 없고

먼저, 사실성의 문제부터 시비를 걸어보고자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폭로전’이다. 우리 언론들은 각 정당의 폭로전에 대해서 “따옴표”를 붙여 보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를 소위 ‘따옴표저널리즘’이라 칭하며 언론을 ‘희롱’하는데 사용한다. 왜냐하면 따옴표를 붙임으로써 일단 ‘사실(facts)’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기사가 문제가 되었을 때 언론사는 그 책임에서 빠져 나오고 폭로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런 보이지 않는 ‘야비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따옴표 저널리즘이 왜 사실성을 위반하는지를 살펴보자.
이를 위해 ‘사실’의 개념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폭로와 관련해서 사실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하나는 ‘폭로행위’라는 사실이 있다. 다른 하나는 ‘폭로내용’이라는 사실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국회의원이 국회 기자실에서 ‘정부가 4000억원을 비밀리에 북한에 지원했다’ 또는 ‘국정원이 전국민을 도청하고 있다’는 폭로행위를 했다고 치자. 이 때 기자회견을 한 것 즉 폭로행위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폭로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언론은 대체로 폭로행위만 있으면 일단 보도한다. 정부가 4000억원이라는 돈을 비밀리에 북한에 지원했는지 아닌지, 전국민을 국정원이 도청을 했는지 아닌지를 가리는 것이 상식적으로 더 중요하지만 언론은 이를 애써 무시한다.
특히 ‘도청의혹사건’의 예는 선거가 시작된 바로 그 다음날에 발생한 사건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 문제의 진실이 선거기간중에 밝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폭로행위의 목적이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전형적인 ‘네거티브전술’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었다. 한데 이를 두고 어떤 신문들은 대서특필하고, 4일 이상 1면 톱기사로 또는 사설이나 칼럼으로 도배를 했다.
이는 먼저, 객관성의 하위 개념이었던 사실성의 위반이다. 폭로행위라는 사실은 인정되나 폭로내용의 사실성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보도의 적합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네거티브 선거전술이라는 성격을 가진 이 아이템을 1면 톱으로 또는 칼럼이나 사설로 부풀려 보도한 것은 잘못된 보도태도이다. 그렇게 ‘튀기고 부풀려 연일 우려먹을’ 만큼 폭로내용의 사실성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증거들이 확보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상식적인 측면에서 접근했을 때, 특정정당의 선거전술을 톱기사 또는 사설이나 칼럼으로 도배한 것은 폭로행위만 집착한 나머지 폭로내용의 사실성을 무시한 것으로, ‘객관성’을 자신들의 규범으로 삼고 있는 언론이 취할 수 있는 보도태도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질적 공정성도 없고

둘째, 질적 공정성 문제다. 앞서 언급했듯이, ‘4000억원 대북 비밀지원설’이나 ‘도청의혹 폭로사건’에서 폭로내용보다 폭로행위를 더 중요시 여기는 보도태도는 객관성을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왜 폭로내용보다 폭로행위에 대해 한국언론은 집착할까. 그것은 정파지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특정한 내용을 폭로하는 행위, 특히 선거를 앞두고 있거나 선거기간 중에는 누가 봐도 선거전술이다.
폭로를 통해서 타격을 입는 편과 이익을 얻는 편이 분명하게 나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은 이 문제를 보도할 것인지 말 것인지 즉 사실성에 대한 판단이 1차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나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도할 것인지에 대해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사안이 있을 때마다 우리 언론들은 사실성이나 공정성이라는 차원에서 고민하기보다는 자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대서특필하거나 축소 보도한다. 대서특필의 경우는 폭로한 당사자가 소속된 집단에 유리하다. 즉 대서특필이란 행위 자체가 일상적인 시기에도 문제가 되는데 선거시기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폭로행위자 또는 폭로행위집단을 일방적으로 편들어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폭로행위를 대서특필한 것뿐만 아니라 폭로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렇다고 언론이 스스로 사실이라고 할 만 증거를 제대로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보도태도다.
폭로내용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각종 지면, 즉 사설이나 칼럼 심지어 일반기사(스트레이트성 기사)까지 동원해서 상대방을 몰아붙이고 심지어 마녀사냥에 가까운 대국민선동을 가하는 것이다. 이런 보도태도는 그 동안 한국의 지배적 언론들이 공공연히 자행해 온 전형적인 질적 공정성의 포기행위이다.

양적 공정성도 없다

셋째, 양적 공정성 문제다. 위의 예를 계속 언급하면, 폭로내용에 대한 상대방의 반박이나 해명기사를 폭로행위의 보도량만큼 할애해주어야 양적 공정성이 지켜진다. 폭로행위가 사실인 만큼 폭로행위에 대한 반박행위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로행위만 강조하거나 반박행위만 강조함으로써 양적 공정성을 일찌감치 포기한다.
‘김대업’으로 상징되는 ‘병풍’에서는 ‘문서오기-조작’ ‘은폐대책회의’ ‘한인옥씨 뇌물청탁’ 등 본질적인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특정언론들은 폭로대상집단의 ‘반박행위’에만 지면을 집중 할애했다. 반면 ‘도청사건’에 대해서는 폭로행위자의 입장을 주로 보도한 반면, 이에 대하여 반박하는 사람과 집단들의 입장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거나 구색맞추기 수준에서 간단히 언급했을 뿐이다. 말 그대로 ‘이쁜 놈은 봐주고, 미운 놈은 때려주는’ 불공정보도의 전형이다.
넷째, 또 다른 측면에서 양적 공정성을 살펴보자. 다음은 필자가 미디어오늘 12월 12일자에 ‘평소엔 찬밥 TV토론땐 빅3-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 대한 방송보도’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던 내용이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12월 3일과 10일에는 소위 ‘빅3’ 대우였다. 하지만 4일부터 9일 사이에는 ‘군소후보’였다. 6·13 지방선거에서 8.1%의 득표율을 기록한 권영길 후보는 벌써 빅3를 두번이나 역임(?)했다. 빅3로 대우하는 곳은 TV토론 직후 뉴스시간이다. 하지만 이때도 온전한 빅3 대우는 아니다. 정책을 놓고 벌이는 논쟁 가운데 권 후보가 뭔가 ‘튀는’ 역할을 했을 때만 빅3 대우이고, 그외에는 권 후보가 어떤 발언을 했건 뉴스는 외면한다.
이번 대선의 특징은 2강 구도로 애초부터 언론이 규정하고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의 근거는 여론조사를 통한 지지율이다. 하지만 대통령선거방송토론위원회(이하 ‘방토위’)가 토론회 참가 기준으로 정한 ‘지난 전국단위 선거에서 5%이상 득표율을 획득한 정당의 후보’는 단순지지율보다 훨씬 더 신뢰성을 갖고 있다. 즉 실질적인 득표율과 표본추출을 통한 지지율 중 어느 것이 설득력을 더 갖고 있는지를 이해하면 된다. 한데 한국 언론들은 지지율을 기준으로 보도의 양을 결정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 관련 보도는 신문과 방송 할 것 없이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책중심의 선거보도는 언론인들의 금언이다. 그래서 선거전후 각 언론사들은 시민단체 또는 연구소 등과 공동으로 정책 및 공약을 검증하는 기구를 신설해서 각 후보들의 정책과 공양을 비교하거나 검증하는 내용의 기사를 경쟁적으로 내보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언론사는 진보정당의 대표적인 후보인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의 정책까지 함께 비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비교 검증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전과 비교해서 진일보한 보도태도임에는 틀림없으나, 정책중심의 선거보도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을 간과했던 보도태도였다.
정책중심 보도의 전제조건은 정당의 정강정책의 분명한 차이이다. 그러나 일부 정책을 제외하고는 서로 ‘베끼기’ 논쟁을 벌일 만큼 보수정당간의 차이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한데 일상적인 유세과정 뿐만 아니라 방금 마치고 난 방송토론 뉴스에서도 특이하지 않으면 배제되었다.
그 결과 유권자들은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 각 당 후보들의 미세한 차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차이가 아니라 ‘표현상’의 차이를 두고 선택을 강요당할 정도였다. 권 후보를 배제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방송사나 신문사에게 있을 수 있었겠지만, 명실상부하게 정책중심 보도를 하려고 했으면 권 후보를 배제하고서는 현실적으로 정책 및 공약 검증이나 정책중심의 선거보도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한국언론의 보도대상의 기준이 판세분석에서 유력한 후보 중심이라는 면에서 보아도, 현실적으로 당락에 주요 변수가 되고 있는 후보를 ‘군소후보’로 분류하고 보도에서 배제했다는 것은 명백한 불공정보도이며 또한 그 의도성 마저 의심받기에 충분한 이해할 수 없는 보도태도였다.
모든 후보들에게 동일한 지면과 시간을 할애할 수 는 없다. 하지만 ‘방토위’라는 공적 기구가 정한 토론회 참가 기준에 부합한 후보, 진정한 정책중심의 선거보도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후보를 배제했다는 것은 언론이 질적 공정성은 고사하고 양적 공정성마저 포기한 것 보도태도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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