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명의 역대 한국 ‘영부인’ 활동 어땠나

건국 이후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프란체스카 여사 이래 국민의 정부 김대중 대통령의 이희호 여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에는 8명의 영부인이 있었다. 과거 영부인들은 단순히 남편(대통령)을 내조하는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 한국 영부인들의 역할과 임무도 상당히 변화했고, 점점 확대·강화되어 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 이순자 여사의 새세대심장재단 비리, 김옥숙 여사의 6공 비자금 개입, 손명순 여사의 아들 현철씨 사건, 이희호 여사의 옷로비 의혹과 두 아들 구속 등 영부인을 둘러싼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 국민들은 현모양처의 전형인 ‘수줍은 그림자적 내조’ 뿐만 아니라 ‘전문성을 갖춘 정치적 동반자’를 원하고 있다. 8명의 역대 영부인들의 각기 다른 모습과 활동을 조명했다.

프란체스카 여사= 영어·불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해 대통령 비서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경무대에 정식 비서 없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3명의 미국인 여비서를 두고 비서실을 운영했을 정도. 영부인으로서 사회봉사활동을 한 적은 별로 없으나 크리스마스 파티 주관과 한국전쟁 이후 군인들을 위문하는 정도였다. 경무대 시절 양말을 직접 기워 신는 등 절약생활을 몸소 보여준 영부인이었다.

공덕귀 여사= 신학을 전공한 전문직 여성으로 약자와 여성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년 8개월의 짧은 임기 탓으로 이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임기 중 공적인 사회봉사활동은 하지 않았으나, 청와대에서 형식을 갖춘 공식 모임보다 방문하는 시민들을 접대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퇴임 후 남영나일론, 동방방적 여성근로자 사건 등과 관련된 인권운동에 앞장섰다.

육영숙 여사=가장 사랑받는 영부인으로 국민들의 가슴속에 자애롭고, 인자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새마을운동의 성공과 홍보를 위해 전국을 순회하는 등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1964년 12월 17일 고관대작 부인들이 주축이 된 자선봉사단체 ‘양지회’를 설립, 운영해왔는데 원래 취지와는 달리 로비장소로 활용되었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1967년 어린이 육영사업의 일환으로 ‘어깨동무’를 발간하고, 어린이회관 건립에 힘쓰기도 했다.

홍기 여사= 역대 영부인 중 재임기간이 249일로 가장 짧았고, 대외활동 면에서 가장 두드러지지 않은 ‘조용한 영부인’으로 남아 있다. 청와대 생활 동안 빗어 올린 머리에 평범한 디자인의 한복을 입은 60대 할머니의 모습으로 공식석상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정치적·사회적으로도 무관심했는데 전통적인 한국 여인의 부덕을 지녔으며, 근검한 성품의 영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옥숙 여사= 이순자 여사와 반대되는 ‘조용한 내조’의 이미지를 지니려고 노력한 영부인이다.
장애인시설, 양로원, 고아원 등 불우시설을 방문할 때도 국민과 언론의 시선을 피하는 것을 제1원칙으로 지켰다. 그러나 사회봉사활동에는 관심 자체가 적었던 영부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일하게 ‘어록’이 없는 영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손명순 여사=청와대 생활의 제약에 따라 상도동 시절부터 꾸준히 방문·관리해왔던 90여개의 불우이웃 수용시설을 9개 정도밖에 방문하지 못했다. 1995년 제4차 북경세계여성대회에도 참석하는 등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나 직접적인 활동은 자제하고 관계법 개정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특히 사회활동에 제약이 되는 탁아소 설치 등 보육 관련 법안에 관심이 많았고, 환경·문화예술·소년소녀가장 문제 등에 신경을 기울였다.

이희호 여사=오랫동안 YWCA 활동을 하는 등 전문적으로 여성운동과 여성권익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역대 영부인 가운데 가장 교육수준이 높고 정치 및 사회경험이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 취임 초기에 기대했던 활동적인 영부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청와대 여성비서관을 늘리도록 건의하는 등 여성권익 활동을 했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다. 1998년 설립된 결식아동돕기 재단 ‘사랑의 친구들’ 명예총재 활동을 현재까지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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