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선거는 언론의 밥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언론은 선거를 즐긴다. 메뚜기(언론)가 한철(선거)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주 명료하다. 선거에 출마한 후보로부터 대접을 받을수 있고, 또 결과가 좋으면 당선자의 임기동안 호시절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살펴야 하는 것은 언론사를 관리하는 일이다. 지방에서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특정인이 어떤 선거에 출마할지 아닐지를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잣대는 그의 언론접촉 여부다. 주변 인맥을 통해 언론에 선을 대려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정치에 뜻이 있다고 판단하면 된다. 이런 호재를 언론이 그냥 놔둘리 없다. 그래서 선거만 되면 설쳐대고, 알아서 기는 것이다.
조중동이 결국 정권창출(?)에 실패했다. 섣부른 사람들은 이참에 노무현당선자가 이들 거대 언론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간단하게 말해 언론의 입장에선 앞으로 5년만 참으면 된다. 더 솔직한 속내로 한 2년 정도만 인내하면 그만이다. 세무조사와 검찰수사라는 극약 처방으로 언론과 기세좋게 전쟁을 치르다가 오히려 역공습을 맞고 동네북이 된 DJ의 실패담이 반면교사다. 물리적 힘은 절대 언론을 죽이지 못한다. 민족일보를 말살한 이승만이나 통폐합의 보도(寶刀)로 언론사를 집어 삼킨 전두환의 신화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언론의 생존술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이런 수법은 야비하고 비열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나라 언론의 절대적인 버팀목이었다.
이런 전후관계를 점잖으면서도 제대로 짚은 글이 하나 있다. <일제시대에는 친일을, 독재시절에는 친독재를, 미국지배시대에는 친미를, 힘과 부를 쫓아 부나방처럼 뛰어드는 우리언론의 모습이 과연 도덕적인가. 물론 여기에는 알맞을 만큼의, 힘센 자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 만큼의 비판이 곁들여진다. 권력 추종에 교활함이 덧붙여진다. 그래서 언론은 위선이 된다.> (2000년 6월 8일, 한림대 김영명교수 문화일보 기고)
비록 거대언론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권을 만드는데엔 실패했지만 앞으로 차기정권을 적당히 추켜세우고, 한편으로 적당히 비판하면서 또 다른 기회를 노릴 것이다. DJ정권처럼 레임덕이 빨리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언론이 선거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행태는 지방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6월 지방선거 때 도내 모 언론사는 이원종지사를 떨어뜨리기 위해 전사적으로 매달렸다. 말도 안 되는 억지주장을 펴면서 ‘생 쇼’를 다 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언론이 특정후보에 집착하면 해당 후보는 당연히 부담스럽고, 선거가 끝난 뒤에도 문제의 언론사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 대선 기간동안 충청리뷰는 일부 독자들로부터 곱지않은 비판을 받았다. 기사가 노무현 지지쪽에 치우쳤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원색적인 욕설까지 리뷰 홈페이지에 올랐으나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나뒀다. 사실여부를 떠나 사이버 공간에서 그 정도의 비판은 수용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몇몇 독자는 리뷰에게 솔직한 ‘컴잉 아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동안 충청리뷰가 게재했던 대선 기사중에서 굳이 특징을 든다면 두가지다. 하나는 병역비리를 여러 차례 거론한 것이고, 또 하나는 민주당에서 한창 흔들어 대던 노무현의 후보자격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병역비리를 꼭 선거와 연결지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정연이의 걸레같은 병적기록부를 보면서 우리나라 고위 관료와 특권층의 병역면제율이 일반인의 4배, 10배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싶었다. 기껏 국민경선으로 후보를 뽑아 놓고도 원칙없이 흔들어대는 민주당의 처사가 못마땅해 노무현을 후보로 인정하라고 주장한 것이 그에 대한 편향적 지지로 비쳐졌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같은 반칙에 언론보고 침묵하라고 한다면 그것이 더 무책임하다는 생각이다. 결국 이런 반칙의 클라이맥스가 정몽준의 기상천외한 희극으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특정언론과 전쟁을 벌였던 노무현당선자의 향후 언론대책(!)이 궁금하다. 노무현은 언론을 이길 수는 없지만 극복하는 길은 경험상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해답을 지난 대선에서 비판적 대안언론과 인터넷이 던져 줬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