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저버린 ‘기대주’들 끝없는 추락

명심보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길이 멀어야 말(馬)의 힘을 알 수 있듯이, 사람의 마음도 긴 시간을 두고 봐야 안다.’(路遙知馬力, 日久見人心) 사람도 오랜 시간을 두고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선을 치른 올해 정치기상도를 보면 ‘긴 시간’까지 허비할 필요없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정치인들이 있다. 특히 이들은 한때 한국정치의 기대주였던 40·50대의 젊은 정치인들이라는 점에서 한국사회에 안겨준 실망감은 더욱 크다.

★정몽준
단일후보 확정 직후
18일간 ‘몽니’…
18일 저녁 노무현 지지 철회… 투표도 안해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52)와 이인제 자민련 총재권한대행(55)은 모두 경선불복의 ‘원죄’를 안게 됐다. 특히 이 대행은 97년 대선에 이어 올해에도 사실상 경선결과에 불복하는 오명을 남겼다. 두 사람은 4선의 중진 정치인으로 ‘50대 대통령’의 꿈을 꾸었던 인사들이다.

정몽준 대표는 12월 18일 저녁 갑자기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투표 개시를 7시간여 앞두고 벌어진 ‘어이없는 파경선언’이었다. 기독교대선연대는 긴급성명서를 통해 정 대표의 ‘결단’을 “기만적 정치행태”로 규정하며 사죄를 요구했다.
지지철회의 표면적 이유는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노 후보의 발언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정 대표가 내세운 지지철회의 명분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18일 명동유세에서 정 대표는 “노 후보를 대통령에 반드시 당선시키자”고 호소했던 터였다. 지지철회의 ‘진의’는 정 대표의 ‘감정’에 숨어 있었다. 즉 노 후보가 자신을 지나치게 홀대했다고 생각해온 정 대표가 18일 명동유세 직후 감정이 폭발해 몇몇 측근들과 지지철회를 전격 결정한 것. 이철 전 의원도 지난 20일 탈당기자회견에서 “밝혀진 공조파기 명분은 실제와 다르다”며 “정책적 차이보다는 감정적 부분이 개입돼 있는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게다가 19일 새벽 국민통합21의 주요 당직자들이 자택으로 찾아가 ‘번의( 意: 먹었던 마음을 뒤집어 돌린다는 뜻) 요청’을 했지만 정 대표는 이것마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었던”(이철 전 의원) ‘번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국민통합21이 결국 ‘정몽준 사당’에 지나지 않았을 극명하게 보여준 대목이다.
12명의 지구당 위원장과 54명의 당직자들도 지난 20일 탈당기자회견에서 정 대표를 겨냥해 “작은 이유를 들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정당, 다수의 의견이 배제되는 정당”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정치혁명’을 내세운 정 대표가 3김정치의 유산인 ‘보스정치’(‘사당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퍼블릭 리더십(public leadership)를 강조해온 정 대표가 사실은 프라이빗 리더십(private leadership)의 소유자였음이 드러났다. 특히 지난 19일에는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아 지도자의 자질에 한계를 드러내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정 대표는 지난 11월 25일 단일후보가 확정된 이후 18일 동안 정책조율을 명분으로 사실상 권력지분을 요구하며 노 후보 지원유세를 미루다 지난 13일에서야 지원유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정 대표는 지원유세를 시작한 지 5일 만에 노 후보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정치적 몰락을 자초했다. 정 대표는 투표 다음날인 지난 20일 “국민과의 약속인 단일화를 끝까지 못지키고 선거 막바지까지 혼란을 끼친 점을 사과드린다. 사려 깊지 못한 판단에 대해 국민과 노 당선자에게 송구하다”는 요지의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며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노 후보와의 2차 회동에서 합의한 ‘당선자 외교특사’ 활동을 기반으로 ‘글로벌 리더’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차기 대권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정 대표의 전략도 물거품이 됐다. ‘붉은 악마’로 상징되는 ‘2002년 6월의 바람’을 정 대표 스스로 차버린 셈이다.

★이인제
두 번의 경선불복과 6번의 당적변경...‘이인제 효과’는 사라지고 ‘학습효과’만 남아
한 인터넷신문은 이인제 대행을 “무늬만 50대일 뿐 낡은 정치의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한” 인물로 평가절하했다. 이 대행은 두 번에 걸친 경선불복(97년과 2002년)과 여섯차례 당적변경(통일민주당→민자당→신한국당→국민신당→국민회의→민주당→자민련)의 소유자다. 특히 두 번에 걸친 경선불복은 스스로 ‘민주주의자’가 아님을 드러낸 한국정치사상 초유의 기록으로 남을 전망이다.
이 대행의 낡은 정치행태는 민주당 국민경선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이 대행은 당내 주도세력인 동교동 구파를 업고 ‘이인제 대세론’을 형성해오다 뜻하지 않게 ‘노무현 바람’을 맞았다. ‘새로운 정치’의 염원이 담긴 노풍에 맞서 이 대행이 내세운 것은 음모론과 색깔론 등 낡은 정치의 유산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풍에 밀리자 이 대행은 노 후보 장인의 좌익전력을 꺼내며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노풍연가’(“대통령 되겠다고 아내를 버리면 용서하겠습니까?”) 한방에 그의 색깔론도 무력화되었다. 음모론과 색깔론 등 ‘20세기 재래식 무기들’이 통하지 않았던 것. 이 대행은 결국 경선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상 두 번째 ‘경선불복’이었다.
게다가 이 대행은 이후 노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후보단일화론이 제기되자 ‘4자연대’니 ‘중부권신당’이니 하며 노 후보를 흔들어댔다. 심지어 ‘한나라당 복당설’까지 나돌자 이 대행은 “내 심정은 무심정관(無心靜觀)”이라며 “나는 사라진 지 오래됐으니 자꾸 건드리지 말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노 후보가 단일후보로 확정된 직후인 26일 저녁 노 후보의 ‘화해 메신저’인 김원기 고문 및 정대철 선대위원장과 술자리를 한 자리에서도 “그냥 가만히 있겠다”며 당 잔류 의사를 최종 밝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대행의 ‘무심정관’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대행은 지난 1일 민주당을 탈당하고 이틀 후인 3일 자민련에 입당했다. 이 대행이 탈당한 진짜 이유는 ‘국정원 불법도청 의혹’이 아니라 “급진이념세력이 가져올 국가적 재앙은 더욱 심각하다”는 그의 발언 속에 있었다. 즉 자신의 경쟁자였던 노 후보의 당선을 막아보겠다는 것.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던가. 자민련에 입당한 이 대행은 JP와 자민련의 중립선언에도 불구하고 충청권을 돌며 이회창 후보 지지활동을 벌였다. 이 대행은 노 후보를 “급진적 사고를 가진 위험한 후보”라며 또다시 색깔론을 제기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이 대행의 연고지인 충남 논산에서 노 후보가 4만8000여 표(61.18%)를 얻어 2만6000여 표(33.11%)를 얻은 이 후보를 압도적으로 앞질렀기 때문이다. 오히려 5년마다 경선불복을 했다는 ‘이인제 학습효과’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김민석
‘단일화 철새’ 자처 MJ 품으로...”박씨를 물고온 제비” “노무현을 위한 심청이”

김민석 전 의원은 앞으로 ‘김민새’라는 ‘오욕스러운 이름’이 계속 따라다닐 것으로 보인다. ‘김민새’는 김 전 의원이 지난 10월 17일 후보단일화 국면에서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대표의 국민통합21에 전격 합류하자 네티즌들이 그의 ‘철새행각’을 꼬집으며 붙여준 별칭이다. 물론 그는 김원길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을 비판하고 “(그래도) 나는 ‘단일화 철새’다”라며 면죄부를 받으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386세대 정치인의 선두주자였던 김 전 의원의 국민통합21 입당은 민주당뿐만 아니라 386세대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김영술·오영식·우상호·이인영·임종석·허인회 등 386세대 민주당 원내외 위원장들은 성명서를 통해 “노무현-김민석과 함께 가는 것이야말로 미래로 가는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던 사람의 변절과 얄팍한 논리에 환멸을 느낀다”며 “그의 입에서 다시는 80년대의 그 뜨거웠던 시대와 함께 했던 동지를 입에 담지 말기를 진정 바란다”고 비판했다. 전대협 의장을 지낸 임종석 의원은 “동지의 이름에서 그를 지우고 싶다”며 ‘절연’을 선언했다.
심지어 386세대 서울대 동문들은 지난 10월 25일 공개적인 반성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서울대 졸업생 42명은 ‘한 386 정치인의 변절과 야합을 지켜보며’라는 제목의 반성문을 통해 “서울대 학생운동의 대표를 자처한 한 386 정치인의 철새 행각에 과거 군사독재 시절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실현에 목말라 했던 386세대로서 참담한 심경을 금할 수 없다”며 “이런 이를 85년 서울대 총학생 회장으로 선출하고 전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 의장으로 추대했던 저희 모두는 뼈를 깎는 심경으로 반성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전 의원의 탈당은 그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노풍 재점화의 계기가 되었다. 김 전 의원이 탈당한 직후부터 투표일 전까지 들어온 국민성금은 67억원(18만여 명)을 넘었다. 그래서 “김민석은 노무현을 위한 심청이” “노무현 후보에게 돈벼락을 안겨준 철새 김민석은 박씨를 물고온 제비”라는 역설적 평가와 함께 “민주당 철새 한마리 떠날 때마다 만원씩 기부하겠다”는 얘기까지 터져나왔다. 김 전 의원의 탈당이 노 후보에게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 전 의원은 또한 후보단일화 협상과정에서 ‘강경론’을 주도해 민주당 안팎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본인은 부인했지만 김 전 의원은 단일화 협상과정에서 노 후보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의원은 지난 19일 이철 전 의원 등 60여 명의 원외위원장과 당직자들이 탈당할 때 처음엔 탈당자 명단에 이름이 올려져 있었지만 기자회견 직후 “명단에서 빼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중간 출구조사 결과 승리하는 것으로 나오자 재빨리 탈당대열에서 발을 뺀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여하튼 김 전 의원은 스스로 정치권 복권의 가능성마저 발로 차버린 셈이 됐다. ◑

‘철새’는 ‘표’로 심판한다!
민주당 탈당파 의원들 지역구, 노무현 대부분 승리

‘철새날개 자른 칼날 표심.’
한 스포츠 신문은 21일자 정치면 기사의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민주당을 탈당한 의원들의 지역구에서 노무현 후보가 대부분 승리한 결과를 표현한 제목. 한마디로 “표심은 배신을 응징했다”는 것.
올 대선 국면에서 민주당을 탈당해 한나라당에 입당한 의원은 총 7명. 전용학(천안갑)·김원길(서울 강북갑)·박상규(인천 부평갑)·원유철(경기 평택갑)·김윤식(경기 용인을)·이근진(경기 고양 덕양을)·강성구(오산·화성) 의원이 그들이다.
2002년 대선 최종 득표 결과, 이들 7명 중 6명의 지역구에서 노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누른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탈당과 한나라당 입당의 첫 테이프를 끊은 전용학 의원의 지역구인 천안시에서는 노 후보가 49.9%를 얻어 42.0%를 얻은 이 후보를 1만6000여 표 앞섰다. 탈당에 ‘경기고-서울대 학벌주의’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 김원길 의원의 지역구에서도 노 후보의 득표율이 더 높았다. 여기에서 노 후보는 55.7%를 얻어 이 후보(39.7%)를 크게 앞섰다. 이는 서울 전체 평균 득표율(51.3%)보다 4.4%가 더 높은 수치다.
박상규(51.6% : 42.2%)·원유철(46.8% : 43.6%)·이근진(50.7% : 44.3%)·강성구(49.7% : 42.4%) 의원 지역구에서도 노 후보가 이 후보를 3.2%∼9.4% 차이로 앞섰다. 다만 김윤식 의원의 지역구에서만 노 후보가 46.7%를 얻어 48.3%를 얻은 이 후보에게 뒤졌지만 표차는 4176표에 불과했다.
한편 민주당 탈당파 중 자민련으로 입당한 사람은 안동선(경기 부천 원미갑)·이인제(충남 논산·금산) 의원 등 2명. 안동선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해 처음엔 정몽준 대표의 국민통합21에 합류했다가 ‘홀대’ 때문에 국민통합21을 나왔다가 자민련에 입당한 경우. 안 의원의 지역구에서는 노 후보가 53.5%를 얻어 이 후보(41.6%)를 2만4000여 표 차이로 앞섰다. 두 번의 경선불복을 기록한 이인제 의원의 지역구에서도 노 후보(60.3%%)가 이 후보(32.8%)를 두 배 가까운 차이로 제쳤다. JP와 자민련의 중립선언에도 불구하고 노 후보를 “급진적인 사고를 가진 위험한 후보”라고 비판하며 사실상 이회창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던 이 의원에게 충격을 줄 만한 표차다. ‘쓰러져 가는 집안’에 발을 딛었다가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밀던 후보까지 패배해 향후 정치적 선택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또 민주당을 탈당해 아직까지 무소속으로 남아 있는 이희규 의원(경기 이천). 이 의원의 지역구에서도 노 후보(47.4%)가 근소한 차이로 이 후보(45.1%)를 누른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탈당 의원들은 노 후보의 당선이 어렵다고 판단했거나 노 후보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사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2004년 총선 때 이들이 지역구에서 다시 당선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물론 김원길 의원은 한나라당 입당 전 ‘2004년 지역구 불출마’를 자신의 보좌관에게 밝힌 바 있어 예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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