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 주권 찾는데 종교 구분 있나”

매서운 칼바람이 공기를 가르는 광화문 열린시민공원. 신부들의 7박 8일 단식기도회가 모두 끝났다. 큼지막한 가방에 그 동안의 짐을 주섬주섬 챙긴 신부들은 시국미사를 끝으로 단식기도회 일정을 마쳤다.
신부들은 모두 지친 모습이었지만 간밤의 눈비에도 큰 탈은 없었다. 도저히 겨울 추위를 버텨줄 것 같지 않았던 스티로폼 판에 얇은 매트리스, 테이프로 누덕누덕 이어붙인 비닐 천막에서 담요를 덮고 일곱 밤을 보낸 신부들은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신부들이 묵었던 바로 그 자리에 스님과 교회 전도사로 활동중인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이 들어와 단식을 이어나갔다.
스님들은 ‘삭발할 머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신학생들은 단식기도회를 시작하기 앞서 머리를 깎았다. 주권회복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서 종교의 벽은 찾을 수 없었다.

“오늘 이 자리는
마침의 자리가 아닙니다”

9일 오후 3시, 생명평화단식기도회의 마지막 미사가 열렸다.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모였다.
길바닥에서는 차가운 한기가 올라왔지만 얇은 신문지나 돗자리에 주저앉은 신자들의 표정에서는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이들은 조용하고 미사를 마쳤다.
대부분 조용히 눈을 감고 경건하게 강론을 들었고 결국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도 있었다.
마지막 미사의 강론을 맡은 것은 문규현 신부. 문 신부는 “촛불시위를 보면서 참여하는 시민들이 모두 반딧불이 된 것 같았다. 효순이, 미선이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느낌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문 신부는 이어 “미국은 아직도 우리의 투쟁에 관심이 없다”며 “예수의 길을 따라 촛불을 밝히자”고 역설했다.
신부들은 미사를 마치며 “단식과 노숙의 시간이 비록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겐 그조차 부끄럽고 죄스러운 시간이었다”고 참회했다. “미군 탱크 밑에 깔려죽지도 않았고 미군 고압선에 감전되어 죽음을 당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신부들이 가지는 ‘부끄러움’의 이유였다.
신부들은 또한 “오늘 이 자리는 마침의 자리가 아니다. 저마다의 본당과 사목지, 지역으로 돌아가 그 곳에서 이 대열을 더욱 깊이 확대해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부들의 말대로 이 날의 미사는 단식기도회를 마치는 자리가 아니었다. 스님과 교회 전도사들이 바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미사가 끝나기 직전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 도착했다. 신부와 스님의 뜨거운 포옹이 이어져 공원에는 각각 다른 사제복의 삭발한 머리들이 뒤섞였다.

“강자 횡포 속에는
부처의 자비 실현할 수 없다”

미사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스님들의 ‘단식농성 입제식’에서 문정현 신부는 “스님들은 삭발할 필요가 없겠다”는 우스개 소리로 연대사를 시작했다.
문 신부는 “스님들이 단식을 이어가는 것이 고맙고 영광스럽다”며 “종교인들이 모여 참세상을 열어가야 한다. 신부들이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본오 스님은 “자비와 사랑과 관용이 인류의 역사 속에 실현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진지하고 성의있는 자세가 갖추어져야만 한다”며 선언문을 낭독했다.
본오 스님은 “강자의 횡포와 약자의 몸부림 속에서는 자비와 사랑과 관용이 결코 실현될 수 없다”며 “미국은 참회하고 우리의 정당한 요구에 대응하는 성의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스님들이 마련한 천도의식에는 불교 신자와 시민들이 참여해 여중생들의 영정에 헌화했다.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문규현 신부도 경건하게 국화 한 송이를 바쳤다.
“평화의 십자가 행진 계속하겠다”

스님들이 자리를 옮겨 ‘숙소‘인 스티로폼 판 위에 앉기 무섭게 교회 전도사들이 플래카드를 펼쳤다. 목탁소리가 멈춘 지 10분만에 공원에는 찬송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도사들은 간단하게 예배를 마친 뒤 삭발식을 가졌다. 신학전문대학원 학생회장인 김두홍(32)씨와 박병규(30)씨, 정준영(31)씨가 머리를 깎았다.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날렸다.
삭발을 마친 김두홍씨는 “자본의 힘으로 정의 위에 군림하는 미국에 대해 이제 칼을 들어야 한다”며 “자신의 뜻을 지키다 죽은 세례 요한처럼 평화의 십자가 행진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스님과 전도사들은 앞으로 3박 4일 동안 공원에서 한 자리에서 단식농성을 진행한다. 스님들은 현재 수경 스님, 진관 스님, 본오 스님 등 3명이 단식에 참여하고 있으며 지방에서 6명의 스님이 합류할 예정이다. 전도사들은 부분 참여자를 포함해 약 20여명이 단식에 참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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