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판이 된 선거

“오늘8통 6반 반상회가 있습니다. 중요 안건은 우리 동을 대표할 만한 참신하고 역량이 있는 동 대표를 뽑는 일입니다.”
반상회 안내 방송을 들으며, 연신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들 저녁을 차려주다 보니 벌써 8시 10분. 늦었다. 회의록을 들고 706호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니 이게 웬 고함 소리인가?
“아니, 내 집에서 강아지 한 마리도 내 마음대로 못 키웁니까?”
“아파트 같은 공동 주택에서 강아지를 키우면 안돼요. 이웃 주민들이 얼마나 불편한지 키우는 사람들은 모른다고요.”
괄괄한 통장님과 805호 아줌마가 기어코 강아지 때문에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어째 지난 번 반상회 때부터 위태위태하더니 드디어 터졌다.
통장님의 말이 지나쳤을 뿐이지 뜻은 과히 틀리지는 않다. 몇 달 사이에 애완견을 기르는 세대가 부쩍 늘어 기르지 않는 주민들의 항의가 쇄도하고 있다. 화단, 비상 계단에 용변을 보기도 하고 . 엘리베이터에 소변을 봐 놓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컹컹’ 짖어 어린아이들이 놀라는 경우도 있고, 주인이 없을 때, 문과 벽을 긁어 그 소리에 신경이 거슬려 살수가 없다고 관리실로 달려와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우리 앞 동 어느 세대에서는 송아지만한 개를 길러 관리실 직원들과 여름 내내 싸웠다. 짖으면 정말로 아파트 한 동 전체가 다 울렸다.
“참말로 밸 시러버라. 지난 번 살던 아파트에서는 암 말도 안 하던데 이 아파트는 해도 해도 별나게 구네.”
“그럼 그 아파트로 도로 가서 사세요.”
“아니, 댁이 뭔데 가라마라 해요?”
그 곳에 모인 주민들도 그저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다. 그들 중에서도 몇몇 세대는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 805호 아줌마가 휑하니 자리를 떠버렸다. 그러자 현관 문 쪽에 앉아있던 아줌마 서너 명이 일어섰다.
‘아니 안 되지 가면 안 되지.’
대통령 공식 선거 기간인 이 시점에 집회가 금지가 되었는데도 무리해서 반상회를 연 것은 동대표를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시면 안 됩니다. 이따가 출석 체크해서 참석 안된 세대 중에서 동 대표를 뽑을 겁니다. 지금 가시면 오늘 반상회 불참입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자하철의 ‘푸시맨’이 되어 그들을 거실로 밀어 넣었다. 주민들을 다시 붙잡아 앉히고는 마음이 바빠졌다.
“우리 109동 동대표를 뽑아야 하거든요. 지금 하시는 분들이 임기가 12월로 끝나기 때문에 다시 선출해야 됩니다. 자격은 109동 주민이면 되구요. 아무래도 대표회의에 참석해서 주민들의 마음을 잘 전달하려면, 사회 경험이 많은 분이 좋겠지요.”
자원해서 동대표를 1년간 맡아 주실 분 안 계시냐고 물어도 손드는 사람이 없다. 예상했던 일이다. 6개월씩 돌아가며 하는 반장 일을 1년째 맡아서 이렇게 쩔쩔 매는 것도 맡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6개월전 맡을 사람이 없어 다시 6개월 하게 됐다고 남편에게 얘기하니 “원래 다 그란다. 장기 집권하려는 사람들 첫 마디가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며 빙글거렸다.
그후 1년 동안, 나는 설날과 추석 두 차례에 농산물 상품권 2만 5천원 한 개씩, 합해서 연봉 5만원을 받고 8통 6반을 장기 집권 중이다.
그러나 오늘 반상회는 강아지를 둘러싸고 통장님이 서슬퍼런 말씀을 날리는 바람에 슬금슬금 눈치보는 반상회가 되어버렸다. 결국 동대표 선출은 뒤로 미루고 건의 사항을 먼저 듣기로 했다. 그러나 건의 사항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차 관리가 엉망이다. 경비 아저씨들 너무 불친절한 거 아니냐”는 게 주민이 관리실에 매달 하는 ‘건의사항’이라면, “쓰레기 분리 수거 제대로 해 달라. 생활 소음 때문에 이웃에 불편을 주니 밤에는 피아노 치지 말아 주십시오”는 관리실에서 주민들에게 매달 내보내는 ‘고지 사항’이다. 나는 주민들에게 ‘고지’ 하고 관리실에 ‘건의’하면서 올 한해를 꼴딱 보냈다.
건의 사항 두 가지를 적는 동안 8통 6반 주민들은 하나둘 일어서더니 다 돌아가 버렸다. 집 주인과 나, 딱 둘만 남았다. ‘오늘 중으로 동 대표를 뽑아야 되는데 다 가버렸으니 이 일을 어떡허냐.’
또다시 장기집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솟구쳤다. 동민들에게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선거판’이 돼야 하는데 강아지 이야기만 하다가 기어이 싸움으로 번져 ‘개판’이 되어버린 반상회…. 이웃과 작은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반상회….
나는 다시 한번 관리실에 부탁을 해야겠다. 이왕이면 좀더 큰 소리로 처절하게.
“8통 6반 반장입니다. 참신하고 역량 있으며 무엇보다도 109동을 사랑하는 주민이면 기꺼이 동대표로 밀겠습니다. 어디 안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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