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말을 버리라는 건가요?”
노무현씨의 말에 대해 우리가 못 알아듣는 건 없으니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이니까.

김동춘 교수의 <대구에 대한 애증(愛憎)> 기사를 감동적으로 읽었다. 이 기사를 읽다보니 지난 월드컵대회에서 ‘한국 대 터키’의3, 4위전이 열린 대구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경기 관전을 위해 갔던 게 아니고 사정이 있어서 못 가게 된 예매표를 찾으러 간 거였다).기차를 타고 간 나는 월드컵 표를 받아들고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던 터라 시내를 둘러보며 거리도 구경하고, 사람도 구경했다. 모처럼 가 본 대구여서 길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대구에서 갈 만한 곳이 어디 있어요. 좀 추천을 해 주세요.”
거리에서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구요? 볼 게 없는데요”라고 말을 했다. ‘아니, 대구가 어떤 곳인데…. 그 대단한 고장, 대구에 대해 이렇게 자부심이 없단 말인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이것은 나의 잘못된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전체’를 표본 조사한 것도 아니었고 스치듯 만났던 극히 일부 사람들의 의견을 들었을 뿐이니 말이다.
결국 모두의 냉대를 받는 ‘대구 관광’에 대해서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그런데 시내버스 안에서 만난 젊은 새댁이 수줍게 웃으면서 ‘갓바위’를 추천해 주었다.
“울면서 올라가긴 해도 내려올 땐 웃을 수 있어요. 좋아요. 그런데 구두를 신어서 올라갈 수 있을는지….”
내 발을 내려다보며 새댁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구두인들 어떠리. 좋은 곳을 갈 수 있다는데… 용기를 내어 무조건 올라가리라.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갓바위로 갔다. 역시 새댁의 예측이 맞았다. 정류장에서 몇 Km를 올라갔는지 기억도 안 나게 엄청 걸었다. 목까지 차 오르는 숨을 고르며 혼자서 어렵게 올라갔다.
나중에 발을 펴 보니 굽 낮은 단화를 신었는데도 발가락에 피가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픔쯤은 이내 날려버릴 만큼, 하늘 아래 서서 바라본 갓바위 정상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때 등산길에서 만났던 경상도 아낙들의 사투리와 관련하여 내가 체험했던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몇 해 전 나는 잘 나가는 대기업 A사에서 사원들의 근무 후 영어 강의를 맡게 되었다. 제조업 분야에선 월급이 랭킹 안에 들만큼 좋은 기업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고, 복지 후생 시설도 잘 되어 있다고 알려진 회사였다.
강의하러 가는 날은 늘 즐겁고 유쾌했다. 정문을 들어설 때면 황송할 정도로 올려붙이는 수위아저씨의 깍듯한 경례와, 회사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야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산소와 아름다운 자연이 있어서 상쾌했고, 무엇보다도 멋있는 청·장년의 남자들을 떼(?)로 만날 수 있어서 발걸음이 더욱 경쾌했다.
내 강의의 수강생들은 갓 들어온 신입사원에서부터 과장, 부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재미있는 것은 앞자리엔 대개 부장들이 앉았고, 뒤로 갈수록 월급이 얄팍한 신입사원들이 앉았다. 그걸 볼 때마다 심기가 불편했던 나는, 이런 자리에 와서까지 월급 티 내지 말고 자유롭게 앉으라고 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신입사원들이 앞자리에 앉아 ‘부장님’께 뒤통수를 보이는 불경죄(?)를 범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결국 끝나는 날까지 나의 당부는 지켜지지 않았다.
나의 수강생 중에 K라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있었다. 강의도 열심히 듣던 대단히 적극적인 학생이었다. K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대구 쪽인지 부산 쪽인지 내게는 다 비슷하게 들리니 남도와 북도를 구별하지 못한다. 하여간 K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심한 경상도 액센트를 지녔다.
수업 중에 문제가 생겼다. 바로 의사소통의 문제. 물론 일방적으로 내가 강의를 할 때는 괜찮았지만 이따금 던지는 질문에 그가 답변을 할 때가 문제였다. 그의 말을 내가 못 알아듣는 거였다. 다시 묻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못 알아들으니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도 또 못 알아듣고... 이런 답답함을 못 참겠다는 듯이 중간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 들어 우리의 대화를 통역(?)해 주었는데 우스운 것은 그 통역이 또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 같은 한반도에 살면서 마치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강의가 끝나고 몇 몇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 웃으면서 K에게 말했다.
“K씨, 우린 지금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고 있어요. 같은 나라에서, 같은 민족이, 같은 말로 대화를 하고 있는데 자꾸 끊기는군요. 영어를 하실 때에도 그 억양이 그대로 남아 있네요. 재밌어요. 그런데 K씨의 말투가 독특한 거예요, 아니면 못 알아듣는 제 귀에 문제가 있는 건가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물론 이런 얘기를 나눌 만큼 그와도 친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K로부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날 더러 경상도 말을 버리라고요? 전라도 억양으로 바꾸라는 건가요? 정권에 따라서 말도 바꿔야 하나요?”
K 역시 웃으면서 말하긴 했지만 너무나 황당한 생각이어서 깜짝 놀랐다.
‘아니, 거기에 왜 ‘전라도’ ‘정권’이 들어가는 거야? 지금 말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대통령들의 말씨에 익숙해 있다가 지금은 귀에 선 전라도 말씨에 거부감이 들어서 그렇게 한번 내쳐 보는 건가?’
물론 정색을 한 건 아니었지만 생각 밖의 과잉 반응이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K씨의 경상도 말을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제주도, 전라도 사투리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의사소통의 어려움에 대해 지금 생각해 보는 거예요. 경상도 억양을 바꾸라는 게 아니에요. 왜 바꿔요? 그럴 필요는 없지요. 아나운서들 중엔 경상도 출신도 있던데 말은 안 바뀌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더군요. 경상도 사람들은 절대로 ‘쌀‘을 발음하지 못하는 줄 알았어요. 그것도 역시 틀렸더군요. 바뀌더라구요. 말이란 게 결국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거니까 그런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려는 것일 뿐이에요.”
언어를 공부한 사람으로 언어 차원에서 말했을 뿐이었다. 무슨 정치나 지방색 등을 겨냥한 이슈 제기가 아니고 말이다. 오래 전에 봤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에 나오는 언어학자 헨리 히긴스 교수의 호기심을 조금 빌렸다고나 할까 뭐, 그런 정도의 관심일 뿐이었다.
그런데 다시 이어지는 K의 말은 좀 섬뜩(?)했다.
“전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겁니다. 절대로 안 바꿔요. 왜 바꿔요?”
너무나 단호한 K의 태도에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내 말은 그의 경상도 뿌리를 바꾸란 게 아니었다. 다만 본인과 대화하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아니면 혹 다시 말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대해 얘길 했던 것이었는데 K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상도 ‘싸나이’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을까. 하여간 우리의 작은 논쟁은 거기에서 끝을 맺고 말았다.
사람들의 말하는 내용과, 태도 그리고 발음에 대해 관심이 많은 나는, 애들을 키우면서 우리말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발음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써 왔다. 그래서 중언부언하는 말이나, 입안에서 오물거리는 말, 횡설수설하는 말에 대해선 분명하게 지적을 해주고 가르치려고 했다. 아나운서들처럼 볼펜을 끼우고 함께 발음을 해본 적도 있었다. 물론 어렸을 땐 좀 듣는 듯하더니 요즘엔 쇠귀에 경 읽기라고 전혀 듣고 있지 않다.
이런 연습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은 언어는 기본적으로 본인을 위한 것이기 보다 오히려 타인을 위한 측면이 많아서이다. 혼잣말이라면 궁시렁거려도, 중언부언하여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이미 내 머릿속으로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글이나 말은 결국 의사 전달, 의사 소통을 위한 거니까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번 TV 토론을 볼 때도 그랬고, 요즘 TV 뉴스의 첫 꼭지에 등장하는 노무현씨의 발음에 대해 우리 애들은 재미있어 한다. 그래서 꼭 따라서 해본다. 어젠 ‘이회창씨 <동섕>이 어쩌고…’ 했다면서 ‘동섕’ 발음을 다시 해 보았다. 그러면서 ‘노무현 아저씨는 항상 <시옷>을 이상하게 발음한다’고 덧붙였다.
노무현씨의 말에 대해 우리가 못 알아듣는 건 없으니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이니까. 경제를 ‘갱제’라고, 관광을 ‘강강’이라고 발음하여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정도만 아니라면 묵인할 만하다는 거다(하긴 TV토론 다음날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이숙영씨가 그런 얘길 하는 걸 들었다. “노무현씨는 경상도 사투리가 심하더군요.” K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던데…).
나 역시 지방 출신인지라 사투리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다. 사실 표준말에 대한 규정 자체도 일부 동의하기 어려운 게 있으니 말이다. 표준어를 뭐라 규정하고 있는가.
<한 나라의 표준이 되는 말로, 우리나라에서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함. (표준어 규정 총칙 제1항)>
‘시간’(현대)이야 그렇다지만, ‘지역’(서울)과 ‘계급’(교양 있는 사람들)에 대해선 글쎄 할 말이 많다. 하지만 그건 논외니 여기에선 제껴 두기로 한다.
사실 전라도 사투리이건, 경상도, 충청도 사투리이건 모든 말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투리란 게 무엇인가. 모태(母胎)와 같은 포근한 느낌을 주는 고유한, 독특한 원천(源泉)이 아니던가. 표준어보다 열등해서 바꿔야 할 ‘시골뜨기 말(語)’이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역주의>의 두터운 벽이다. 지역주의 역시 지역뿐 아니라 언어를 초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우리가 남이가’의 교묘한 술책 앞에, 그저 같은 사투리를 쓴다고 해서 무조건 동조하는 망국적인 온정주의는 이제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대통령을 뽑는 중요한 이 시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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