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상공 날은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언론학자에 의해 새로 태어난 안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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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상공 날은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언론학자에 의해 새로 태어난 안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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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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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여의도 간이 비행장 이륙 15분간의 비행… 한국 항공의 시발점
일제시대불구 한반도 그려넣어 금강호로 명명

1922년 12월 8일 오후 5시 5분. 서울의 여의도 간이 비행장에서 안창남 비행사가 우리나라 최초로 비행을 하였다. 우리나라 항공 역사의 첫 페이지를 연 것이다.
지난 8일은 우리나라 첫 비행의 80주년이었다. 이 80주년을 맞아 한국인으로 우리나라 상공을 최초로 비행한 안창남 선생의 흉상이 제작되었다. 세월과 무관심에 묻혀졌던 안창남 비행사의 새로운 조명은 언론역사학자 박정규박사(한남대 겸임교수)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서였다. 80년만에 새롭게 태어난 한국인 최초 비행사 안창남 선생을 조명해 본다.
일제 침탈에 의해 암울하던 1922년 12월 10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열린 ‘비행 행사’는 우리민족에게 감동적인 꿈을 심어주었다. 동아일보의 주최로 일본 비행학교의 교수로 있던 안창남 비행사의 ‘모국방문 대비행’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날 5만여 관중이 운집했으니 당시의 안창남 비행사의 첫 비행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이에 앞서 안창남 비행사는 이틀전인 12월8일 시험 비행을 공개적으로 실시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이 비행한 최초의 날이 되는 것이다. 이날 오후 5시5분 여의도 간이 비행장을 이륙하여 한강교와 용산을 거쳐 남대문을 선회하여 돌아온 15분간의 비행은 한국 항공사의 시발점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인 첫 비행이 일반 사회에서는 물론 항공계에서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아 소중한 우리의 항공역사가 묻혀져 있었던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가 비약적인 항공산업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 뿌리를 잊고 지냄으로써 항공 정신과 사상적 토대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진 각국들은 최초의 비행을 기념하며 이를 기리고 있다. 일본의 경우 1910년 12월19일 토쿄의 요요기 연병장에서 토쿠가와 육군대위가 프랑스에서 들여온 복엽기로, 히노 대위가 독일에서 수입해온 단엽기로 공개 비행한 것이 첫 비행으로 공인되어 있다.
이날 아침 두 번정도 활주하고 이륙하여 약 80미터 높이로 연병장 상공을 두 번 돌고 비행 4분간에 약 3000미터를 날은 후 착륙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일본은 지난 1960년 50주년 행사를 하였으며 2년전에는 9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루고 기념 우표도 발행함으로써 첫 비행일을 기렸다.
사단법인 안창남 기념사업회 박정규회장은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한 사실은 잘 알고 있으나 안창남 비행사가 조국 하늘을 비행한지 꼭 80주년이 된다는 점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고 있다”며 “우리나라가 항공문화를 개척하고 축적해 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를 발굴하고 연구해서 초창기 비행사의 선구적인 업적을 기려야 한다”고 말한다.

최초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창남

안창남 비행사는 우리나라 상공을 난 첫 번째 비행사라는 항공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 이외에 독립운동가요 과학대중화 운동의 선구자로 그 업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1901년 3월 서울에서 태어난 안창남은 휘문고보 시절 미국 비행사 아티스 스미스가 조선에 날아와 커티스호로 벌인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되어 상공을 날아보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이후 일본으로 가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를 거쳐 오쿠리 비행학교에 입학,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인정받아 졸업과 동시에 조교수가 되어 후진양성에 나선다.
국내에 안창남의 활약이 알려진 것은 1921년 일본 항공국 주최 비행면허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후였고, 이듬해 일본제국비행협회가 주최한 토쿄-오사카간을 왕복하는 우편 비행대회에 참가하여 또 다시 우수상을 차지함으로써 그의 조국 방문 비행이 추진되었다.
드디어 1922년 12월10일 5만의 관중앞에서 역사적인 안창남의 고국방문 비행이 거행되었다. 첫 번째 비행은 15분간 체공한 짧은 비행이었지만 관중들의 환호는 대단하였다. 두 번째 비행은 곡예비행을 하며 25분간 계속되어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이때 비행은 80마력 엔진으로 평균시속 140킬로미터 정도인 ‘금강호’였다.
안창남은 일본 비행기였지만 일본국기를 지우고 한반도를 그려넣고 금강호로 명명한 것이다. 안창남의 조국 사랑과 독립정신은 이때부터 발현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제의 압박에 신음하던 식민지 민중들에게 선보인 안창남의 모습은 “떳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를 유행시켰던이다. 그야말로 그 시대의 영웅이었다.
그렇지만 고국방문 비행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것과는 달리 안창남비행사후원회에서 전개한 모금 활동은 부진하여 안창남에게 새로운 비행기를 마련해 줄 수는 없었다. 국내에서 비행학교를 내어 후진 양성에 힘쓰겠다는 소망이 무산되어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관동대지진 사건을 겪고 난 뒤 안창남은 가슴속에 품고 있던 조국 독립운동을 실현시키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다. 일단 염석산 군벌의 항공 중장으로 초빙되어 그의 군대에서 복무하면서 한국인 동지들을 규합하여 비밀 항일무장투쟁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한다.
대한독립공명단은 안창남의 항공학교 한국인 제자들과 타이위안에 있는 교포들이 주축이었고 비행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여기서 배출되는 비행사를 통해 조국 독립투쟁에 나서는 것이 목표였다. 공명단 단원들은 국내로 진입하여 총독부의 우편 자동차를 습격하는 거사를 벌이기도 했지만 일경에게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특히 항일 비밀 결사조직인 공명단의 활동은 안창남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종식되어 버렸다.
안창남은 1930년 4월2일 타이위안 천지단에 있는 산서항공학교 앞에서 뜻하지 않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30살의 짧은 생을 마친 것이다.

애국청년 안창남 재조명
안창남 기념사업회

안창남의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사후 71년이 지난 2001년 8월15일 광복절을 기해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함으로써 공인받게 되었다. 여기에는 안창남 기념사업회의 독립유공자 지정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창남은 중국으로 망명한 후 중국 군벌의 산서 항공학교에 몸담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항일 무장투쟁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여 활동한 면모는 이제껏 밝혀지지 않다가 지난해 안창남 비행사 탄생 1백주년 회고전을 계기로 기념사업회에 의해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안창남기념사업회는 지난 98년 10월 발기인 대회를 갖고 이듬해인 99년 3월 창립됐다. 이런 사업회 발기는 박정규교수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고 그의 주도적 연구로 빛을 보게 된다.
언론역사를 연구해온 박교수는 일제시대 신문 보도를 통해 그 시대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안창남 비행사를 발견하게 되고 그의 일대기를 추적하다 보니 이렇게 잊혀져선 안될 항공문화의 선구자며 독립운동가란 사실을 밝혀내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사업에 나선 것이다.
박회장은 “언론사를 연구하다 엄청난 용기와 자긍심을 식민지 우리 민족에게 안겨줬던 안창남 비행사의 일대기가 묻혀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어 안타까움에 그를 기리는 기념사업에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절명에 ‘애도’ 사설도 나와

너무도 짧게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안창남에 대해 당시 국내의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기사와 함께 사설로 애도를 표하였다. ‘조선의 상공을 정복한 최초의 용사 안창남씨가 중국에서 세상을 떠나’ 등의 제목으로 보도된 기사는 그를 기억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 민경명 기자

“항공 정신과 사상 확립 해야”
안창남 기념사업회 회장 박정규 교수

비행사 안창남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는 언론학자 박정규교수에 의해 시발됐다. 언론학자의 비행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어쩐지 부조화 처럼 보인다. 하지만 언론역사 연구 중 불꽃처럼 살다가 간 항공문화의 선구자요, 애국청년인 안창남의 생애를 발견하고 이렇게 묻혀있는 것이 안타까워 시작한 기념사업은 우리나라 항공역사의 재발견 이었다.
안창남기념사업회는 지난해 안창남의 독립운동 활동을 규명하여 국가유공자 지정을 신청함으로써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게하는 구체적 성과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성과는 안창남의 첫 비행을 한국 항공역사의 시발점으로 규명하고 기념함으로써 우리나라 항공 정신과 사상적 토대를 굳건히 했다는 점이다.
박정규회장은 “안창남 비행사는 당시 우리 식민지 민중에게 엄청난 용기와 자긍심을 심어준 영웅이며 항공 선구자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져 있었다”며 이제 국가적 기념사업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1999년6월 창립 이후 3개월만에 안창남 비행사 연보를 정리하여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안창남 혼맞이 공연(천안 독립기념관, 2000·4), 안창남관련 전래노래 채보 공개모집(2000·5), 일본소재 안창남 비행사관련자료 수집정리, 우정사업본부에 2001년3월 우표발행요청,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지정을 위한 서류제출 등으로 기념사업의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2001년 3월 안창남의 모교인 서울 종로구 경희궁 공원 서울 미동초등학교에서 제1회 안창남 문화축전을 개최했다.
또한 지난해 10월에는 ‘사이버 안창남 기념관’(www.anchangnam.or.kr)을 개관했고 10월19-11월2일까지 안창남 탄신1백주년기념 행사, 올 4월 제2회 안창남 문화축전 등을 개최했다.
안창남 비행사가 우리나라 상공 첫 비행에 나섰던 비행기 금강호 복원은 최대 역점사업으로 마무리 단계다.
“우리 청소년들은 비행기 역사를 논할 때면 라이트 형제만 들먹인다. 아무도 안창남과 같은 훌륭한 항공 선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항공문화는 후진국 수준이다. 우리의 항공산업이 초음속 훈련비행기를 제작할 만큼 발전했다고 하지만 항공 정신과 사상의 확립 없이는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게 박회장의 말이다.
아울러 안창남 기념사업회가 국가적 사업으로 되어 동상도 세우고 기념관도 여는 일을 해야 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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