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中 국경, 단동은 ‘분단’이 상품

고구려를 보러 호산장성에 오르다
장보고, 적산 법화원에서 부활하다
새롭게 창조되는 자싱 김구 피난처


한국의 서해안과 중국의 동해안은 서로를 마중나온 듯 가깝다. 그래서 ‘바람이 잔잔한 새벽이면 중국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옛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6월12일부터 21일까지 열흘 간의 일정으로, 지역신문발전위원회가 주최한 중국 단기연수는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선양(瀋暘), 단둥(丹東), 다롄(大連), 옌타이(煙臺), 웨이하이(威海), 칭다오(靑島), 항저우(杭州), 이우(義烏), 자싱(嘉興), 상하이(上海) 등 모두 10개 도시를 돌아보는 대장정이었다. 어림짐작으로도 7000km가 넘는 거리를 버스와 배, 비행기로 이동하며 중국의 문물과 중국 진출 한국 기업, 중국 기업 등에 대해서 취재했다.

중국 취재기를 ①중국, 한국을 팔다 ②시장이 있기에 간다 등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중국이 한국을 팔고 있다. 구매자는 중국 사람이기도 하지만 창끝은 한국 관광객을 겨냥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바다 건너 중국까지 한국을 사러가는 셈이다.

‘중국이 한국을 판다’는 얘기는 한국의 고대사와 근대 역사 등을 주제로 한 관광지와 기념물 등이 중국 현지에 조성되면서 한국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1200년 전 신라 해상왕 장보고가 적산 법화원에서 신격화 됐거나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피난처 였던 자싱에 당시를 재현한 건물과 거리가 새롭게 조성되고 있는 것 등이다. 법화원의 장보고 기념관은 우람한 동상과 6개에 이르는 전시실 등 규모면에서도 만만치 않다.

심지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맞닿아있는 단둥은 도시의 컨셉 자체가 분단을 상징화하고 있다. 한국 관광객들은 단둥에 들러 유람선을 타고 주민들의 표정까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북한에 가깝게 다가간다.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 단교의 끄트머리에 서면 분단의 비애에 가슴이 저려옴을 느끼게 된다. 다리 난간에 매달린 스피커에서는 단조의 선율이 애잔하게 흘러나온다.

▲ 미군 폭격으로 끊긴 단교와 새로 개설된 중·조 우의교가 나란히 압록강에 놓여있다. 단둥에서는 분단자체가 관광상품이다. 미군 폭격으로 끊긴 압록강 단교 랴오닝성 단둥과 신의주 사이에는 2개의 큰 다리가 나란히 놓여져있다. 하나는 온전히 이어져 끊임없이 열차와 대형 화물차들이 오가는 ‘중·조우의교’이교 다른 하나는 ‘압록강단교’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끊어진 다리다. 건널 수 없는 단교와 달리 중·조우의교는 물류의 흐름이 빈번한데 중국에서 만든 공산품이 건너가고 북한의 농산물이 건너온다고 한다. 한국으로 수출되는 북한 농산물도 대부분 이 다리를 건너 단동에서 집산이 이루어진다. 단교의 본래 이름은 ‘회전교.’ 일제가 1943년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건설했으나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중국군의 개입을 막기 위해 장장 7일 간에 걸쳐 폭격을 퍼부으면서 지금은 중국쪽으로만 반토막이 남아있다. 폭격으로 끊어진 단교의 끝부분에는 ‘단(斷)’이라는 글씨를 새긴 바위를 가져다놓아 극적인 역사의 단면에 방점을 찍었다. 북한 최대의 수력발전소인 수풍발전소, 조선 건국의 도화선이 된 위화도 등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압록강 유람선은 보다 극적으로 북한을 체험할 수 있는 관광 상품이다. 강에는 국경이 없다. 뱃머리가 신의주를 향해 돌아설 즈음이면 ‘21세기의 태양 김정일장군 만세’라는 현수막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고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북한 어부들도 지척에 있다. 특구 개발로 높은 빌딩이 즐비한 중국 측과 달리 한산한 어촌 풍경이지만 유람선을 바라보는 북한 주민들은 손인사로 동포애를 전한다. ▲ 호산장성에서 내려다 본 신의주는 바로 지척인 듯 가깝다. 한무리의 북한 군인들과 주민들이 공동작업을 벌이고 있다.
만리장성으로 둔갑한 고구려성

단동 외곽에는 고구려성으로 알려진 호산장성이 있다. 그러나 관광지 안내판에는 이 장성이 ‘만리장성의 시작젼이라고 소개돼 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슬그머니 뒤집어놓은 것이다.

고구려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의 속셈이 여기까지 미쳤는지는 모르지만 호산장성은 전돌을 쌓아 말끔하게 정비돼 있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에 중국풍의 현재 모습으로 정비됐다고 하니 고졸한 옛 성의 풍모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어찌됐든 팥죽땀을 쏟으며 성루에 오르면 성벽 바로 아래가 북한 땅이다. 장성 아래에는 도도하던 압록강 물줄기도 개울물로 기세가 수그러들어 폭이 좁은 곳은 2m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국경과 맞닿아 있는 중국 마을의 이름도 ‘한걸음에 불과하다’는 뜻의 ‘일보과(一步跨)’ 마을이다.

철책과 경계도 없는 일보과 마을에는 부침개 종류의 음식과 주류 등을 만들어 파는 점방도 눈에 띄는데 북한 사람들의 왕래도 심심치않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 관광객이 한걸음에 불과한 개울을 건너면 국가보안법 상 ‘잠입탈출죄’를 면할 길이 없다. 북녘의 산하를 코 앞에 두고도 눈요기만 하고 돌아서는 발길은 자갈길에 애꿎게 먼지만 폴폴 날린다.

6월13일 호산장성 아래 국경 부근에서는 50여명의 북한 군인들과 주민들이 인공기를 펄럭이며 작업을 벌이고 있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 법화원에 있는 장보고 동상. 장보고, 적산 명신과 어깨를 나란히웨이하이에 있는 적산 명승지는 중국의 ‘AAAA급 명승지’다. 적산 명승지에는 법화원이라는 사찰이 있는데, 바로 해상왕 장보고가 건립한 절이다. 우리나라에서 뱃길로 지척인 중국 산동성에는 무역을 위해 왕래가 잦았던 신라인들이 항해의 안전 등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사찰, 즉 ‘신라원’이 여럿 있었는데 법화원도 그 중에 하나다. 현재의 법화원은 중국의 거대 수산기업인 적산수산집단 유한공사가 420억원에 이르는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산봉우리에는 거대한 규모의 ‘적산명신(赤山明神)’ 동상이 있는데, 장보고는 법화원을 다녀간 일본 승려 엔닌에 의해 일본 내에서 적산명신, 혹은 신라명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법화원에서 장보고가 신격화되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규모를 갖춘 장보고 기념관이 있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념관 앞마당에는 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장보고 입상이 서있고 6개에 이르는 전시실에는 밀랍으로 만든 정교한 인물 디오라마를 비롯해 관련 사료 등이 잘 구비돼 있다. ‘KBS 대하사극 해신’의 제작과정을 소개하는 전시실도 있다. 이 전시실에 있는 대형TV에서는 물론 해신이 상영되고 있다. 웅장한 산자락에 여러 채의 전각, 목탑, 불상 등이 즐비한 법화원은 불교성지로도 손색이 없는데, 특히 청동으로 조성한 관세음보살상에서 벌어지는 ‘분수쇼’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장엄한 독경소리와 합창곡을 시작으로 분수쇼가 시작되면 거대한 관세음보살상이 서서히 360도 회전을 하고, 좌대 아래에 조성된 춤추는 자세의 천상의 신들도 역시 회전을 하며 자태를 뽐낸다. 관세음보살이 들고 있는 감로수 병에서는 간혹 감로수가 흘러내리고 우락부락한 표정의 금강역사들은 굉음과 함께 입에서 불을 뿜으니 그 장대한 스케일에 넋을 잃을 정도. 5월27일 문을 연 자싱 김구 피난처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코우 공원 의거 이후 일본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8년 동안의 이동 경로를 거쳐 1940년에 충칭에 정착한 뒤 1945년 해방을 맞이한다. 이 가운데 저장(浙江)성 자싱시 메이완제 거리 76번지에 있는 주택은 상하이를 떠난 김구 선생이 2년 동안 숨어지냈던 상하이 법과대 학장이자 민족주의 운동가 추푸청의 집이다. 자싱시 인민정부는 이 지역을 성급문물보호지역으로 지정한 뒤 청나라 말기에 지어진 2층 규모의 이 목조건물을 재현해 5월27일 김구 피신처 기념관으로 공식 개관했다. 이날 개관식에는 왕춘 자싱시 부시장, 추푸청 선생의 후손, 김신 백범기념사업회장, 김양 주 상하이 총영사 등이 참석했다. 자싱시는 또 인근에 이동녕, 박찬익, 김일한 선생 등이 머물던 한국임시정부요원 숙소도 함께 개방했다. 메이완제 거리는 김구 선생의 피난처인 추푸청의 집 외에도 거리 전체를 당시의 분위기로 조성하고 있어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다. 지금까지 상하이를 경유하는 중국관광에서 빠짐없이 들르는 관광코스는 상해임시정부 청사였다. 그러나 자싱의 김구 선생 피난처 조성이 마무리되면 주변이 정비되지 않은 상해 임정청사 보다도 더욱 각광을 받게될지도 모른다. 김구선생과 처녀뱃사공의 애틋한 순애보 광동인으로 신분을 속이고 주아이빠오와 선상생활 자싱에서는 당시 돈으로 60만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목에 건채 도피생활을 하던 김구 선생과 중국의 처녀 뱃사공 주아이빠오 여사의 애틋한 순애보를 귀동냥할 수 있었다. 백범일지에도 등장하는 주아이빠오는 당시 추푸청의 집에서 일하던 식모의 20살 난 딸로 자싱에 있는 호수에서 배를 젓던 처녀뱃사공이었다. 추푸청의 집에 숨어있으면서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김구 선생은 매달 15원씩을 주기로 하고 주아이빠오의 배에서 선상생활을 하게 되는데, 상하이에서 돌림병으로 부인과 아이를 잃은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를 통해 ‘부부 비슷한 관계’라고 언급할 정도로 37살 연하의 주아이빠오와 긴밀한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아쉬운 작별을 나눌 때까지도 자신의 신분을 광동 출신의 고물상으로 속이고 살아야 했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서 주아이빠오를 회고하는 부분은 실로 눈물겹다. “내가 남경서 데리고 있던 주애보를 거기를 떠날 때 고향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후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 때 여비 100원만 준 일이다. 그녀는 5년이나 가깝게 나를 광동인으로만 알고 섬겨왔고, 나와는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겨서 실로 내게 대한 공로란 적지 않은데…” 자싱 남호에는 중국공산당이 선상회의를 했던 나룻배가 그대로 재현돼 있다. 환갑을 바라보는 혁명가 김구도 남호에 뜬 나룻배에서 독립운동의 동지들을 만나 선상회의를 가졌다고 하나 지금은 관광객을 실은 유람선 만이 무심히 남호의 물살을 가르고 있다. ▲ 중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유적을 재창조하다시피 새롭게 조성하고 있다. 사진은 자싱에 잇는 김구 선생 도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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