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민주지산 인민군 유격대와 미군 접전
미공군 집중폭격, 영동 노근리·단양 곡계굴 학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전국 규모의 심층 토론회가 청주에서 열렸다.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는 2006년 하계워크숍 일정으로 지난 24일 민간인학살 충북대책위,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공동으로 ‘전쟁과 지역사회’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충북개발연구원 김양식 박사의 ‘한국전쟁에 따른 충북지역 인구변동’ 주제 발표가 관심을 모았다. 핵심내용은 전쟁중 도내 시·군 가운데 단양, 영동군의 인구감소폭이 가장 컸다는 사실을 분석한 것이다. 특히 두 지역은 미군의 집중폭격 피해지역으로 드러나 미군 폭격에 의한 양민학살 사실을 뒷받침하는 방증자료가 되고 있다. 다음은 김양식 박사의 발표논문을 재정리한 것이다.  

충북은 전쟁직후 인구이동율이 전국적으로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직전인 49년 충북인구는 114만5964명이었으며 종전무렵인 52년도에 3.8% 늘어났고 휴전상태인 55년엔 0.1% 증가에 그쳤다. 당시 전국 통계를 보면 52년도 서울, 전남, 강원도는 피난과 빨치산 토벌전투로 인구가 줄었고 경남(16.8%) 등 다른 지역은 인구가 늘었다. 또한 55년도엔 전국 평균 증가율이 4.8%에 달해 충북의 0.1%는 이례적으로 가장 낮은 수치이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충북의 타 도 유출인구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충북은 전통적인 농업사회를 유지했고 해방이후에도 ‘어느 지역보다 보수적이고 정태적인 사회’였다는 것. 따라서 전쟁시에도 다른 지역에 비해 피난민의 유입이나 자체 피난민 유출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분석이다. 

특히 52년~55년까지 3년간 도내 11개 시·군 인구동향을 보면 청주, 충주이 늘어났고 제천, 영동은 정체상태이며 나머지 7개 군은 모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농촌 산간지역의 전쟁 후유증이 심각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전쟁복구기인 55년~59년 동안 도내 인구증가율은 6.1%로 전국 평균에 약간 못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때 도청소재지인 청주시의 증가율이 1.3%로 도내에서 가장 낮은 것이 이채롭다.

이에대해 김 박사는 ‘전쟁직후 인구가 집중됐던 청주시는 더 이상 인구를 흡수할만한 사회경제적인 수요를 초과, 인구과잉에 따른 한계점에 이르렀다’고 분석했다. 도시의 실업률이 높은 상황에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이 중단됐다는 것이다. 반대로 55년이후 도내 인구이동은 충주, 제천, 단양 등 북부지역으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거나 청주등지로 피난한 사람들이 귀향한 결과로 보인다.

영동군의 경우 52년도 인구수는 전쟁직전 49년도보다 6.5%가 줄어들었다. 같은 시기 단양군은 10.9%까지 크게 감소했다. 종전후 사회 안정화에 따라 두 지역은 55년~59년 동안 각각 3.1%, 9.5% 인구성장이 있었지만 49년도의 인구수준을 넘지는 못했다. 그만큼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컸다는 반증이다.

=단양군의 양민학살과 인구감소
단양군은 해방직후부터 우익의 주도하에 사회안정이 이뤄졌다. 45년 12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단양군 대표를 파견하지 못할 정도로 진보 또는 좌익의 세력이 미약했다. 48년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 거부운동을 벌인 좌익세력에 대한 경찰의 일제단속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충북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영동군이 457명으로 가장 많았고 청주시 399명, 제천군 234명, 옥천군 197명 등 도내에서 총 1565명이 검거됐으나 단양군은 39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단양지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은 소백산을 중심으로 인민유격대와 빨치산이 활동을 시작한 49년부터다. 이들은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중앙선 열차를 폭파하는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자 육군본부는 49년 9월 단양에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해 산간지역 농가 3천호를 강제이주시키는등 토벌작전에 나서기도 했다.

전투사령부는 50년 3월 해체됐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남북 격전지로 부상됐다. 인민군 패잔병이 소백산에서 게릴라전을 펼쳤고 남측 경찰 및 의용경찰·청년방위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51년 1·4후퇴 때 인민군 2사단이 남하하면서 단양군 영춘면을 장악한 경찰병력을 밀어내고 의풍초교에 본부를 설치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미군은 일반 피난민의 이동을 통제하는 한편 ‘적의 은신처로 사용되거나 사용될 것으로 의심되는 전방 주거지나 건물들을 지체없이 조직적으로 파괴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따라 미공군은 단양, 영월, 예천, 풍기 등 소백산 지역의 초토화 작전을 벌여 75%가 불에 타고 8천명의 피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51년 1월은 단양 곡계굴에 피신했던 민간인 360여명이 미군 폭격에 의해 떼죽음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또한 최근 본보가 보도(제 432호)한 노동리·마조리 210가구 방화와 주민 103명 학살사건도 이 시점에 발발할 것이다. 단양군은 백두대간의 길목에 위치한 불행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많은 인적·물적피해를 당해야했다. 이로인해 55년 단양인구는 49년도 보다 8천명이 줄어드는 결과를 나타냈다.

=영동군의 양민학살과 인구감소
영동군은 일제치하에서도 혁명적인 농민운동이 활발했고 해방이후 도내 좌익세력의 거점이었다. 당시 미군정은 영동군을 ‘적색군’으로 표기하기도 했다는 것. 특히 장준(1895~?)은 1927년 조선공산당 충남북도책을 맡아 농민운동을 주도했고 해방직후 여운형의 건국동맹에서 충청남북도 대표를 역임했다. 46년 10월 남노당 청년당원 300여명이 경찰서를 습격하고 우익단체 회장 집을 파괴하는등 격렬한 활동을 벌였다. 이후 영동 남로당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었고 쫓기는 남로당원들은 ‘빨치산’으로 전환했다.

이들은 48년부터 민주지산 삼도봉을 근거지로 중선(中鮮)구국유격대를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벌였다. 경찰서 습격과 우익인사 처형 등 지속적인 활동을 벌였고 군경의 진압작전도 상시적으로 이뤄졌다. 이런 상황에서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7월 북한군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방전이 벌어졌다. 옥천전투와 상주 화령장전투에서 한국군이 패한뒤 영동은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한 미군의 폭격이 집중됐다.

미군 27사단과 북한군 2사단 사이에 6일간에 걸친 교전이 있었고 미군은 400여명의 병력손실을 입고 7월 29일 새벽 후퇴했다. 영동시내 대부분의 관공서는 불탔고 7월 26일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으로 400여명의 민간인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민주지산을 근거지로 한 인민군 유격대 활동이 계속되다가 53년 4월 삼도봉 전투를 마지막으로 영동에서는 비로소 전쟁의 총성이 멎었다. 이같은 전쟁의 상흔으로 52년 영동군 인구는 49년보다 7천명(6.5%) 감소했고 3년뒤인 55년 인구도 210명(0.2%) 증가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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