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대선 ‘부산 초원복집 사건’부터
2002대선 ‘노 후보 장인의 좌익전력 논란’까지

▲ 92년 대선 ‘부산 초원복집 사건’
92년 12월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현 한나라당 의원)과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부산 초원복집’에 모여 당시 민자당 후보였던 YS를 밀기로 합의했다. 이는 당시 부친인 정주영 국민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고 있던 정몽준 의원(현 국민통합21 대표)가 이들의 대화내용을 비밀녹음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른바 ‘부산 초원복집 사건’이 터진 것이다. 처음엔 ‘관권선거’ 논란이 일었지만 집권여당에 의해 ‘불법도청사건’으로 비화되면서 되레 영남지역주의를 자극해 영남표를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당시 YS는 “북한의 평양방송이 김영삼을 낙선시키고 김대중을 당선시키라는 방송을 했다”며 DJ를 용공분자로 몰아부치며 색깔공세를 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간첩 이선실 사건’이 터졌다. 모두 DJ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네거티브 선거전술이었다.
▲ 96년 4·11총선 직전 ‘판문점 북한군 출몰사건’
96년 4·11 총선 직전에는 ‘판문점 북한군 출몰사건’이 터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DJ가 집권한 직후인 98년 10월 안기부가 ‘KAL기 사건’과 ‘간첩 이선실 사건’, ‘오익제 사건’,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 등을 ‘북풍 의혹 사례‘로 들며 ‘판문점 북한군 출몰사건’에 대해 수사하겠다고 밝힌 점이다. 당시 안기부는 “당시 집권당이 선거 때마다 북한의 불순책동으로 어부지리를 얻은 데 대해 국민들이 석연치 않게 여기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한나라당은 이에 “국기를 뒤흔드는 발상”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139석을 얻은 데 반해 국민회의는 79석에 그쳤다.
▲ 97년 대선 ‘색깔론 자극 사건들’
97년 대선 때는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과 ‘DJ비자금 조성 의혹’이 맞부딪혔다. 이 후보는 두 아들의 병역문제로 낙마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또한 장남인 정연씨는 사회봉사활동을 위해 소록도로 내려가야 했고, 차남인 수연씨는 미국에서 귀국해 공개적인 키재기를 감수해야 했다. 한편 이 후보는 “DJ가 친인척들의 가차명계좌를 통해 670억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관리해왔다”며 ‘DJ 비자금 조성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검찰이 수사유보 결정을 내리면서 일단락됐다. 특히 ‘병역면제 의혹’과 ‘비자금 조성 의혹’은 당시 DJ와 이 후보의 당락에 큰 영향은 미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됐다.
97년에도 여지없이 색깔론을 자극하는 사건들이 터졌다. ‘간첩 고영복 사건’과 ‘오익제 입북사건’이 대표적이다. 특히 천주교 교령을 지냈으며 국민회의 당직을 역임했던 오익제씨의 입북사건은 ‘대권 4수’의 DJ를 매우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DJ 집권 이후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의 비선조직이 이 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해 북한측에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는 이른바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피고인들은 2001년 4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 2002년 민주당 경선과 이인제의 음모론·색깔론
네거티브 캠페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6·15 남북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됐다. 당시 신장개업한 집권여당(민주당)은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 오히려 야당 지지자들의 단결만 초래한 것. 당시 민주당은 야심찬 남북정상회담 계획 발표에도 불구하고 115석에 그쳐 ‘여대야소‘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올 초 열린 민주당 국민경선에서도 음모론과 색깔론 등 네거티브 캠페인이 난무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노무현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자 이인제 후보 진영은 청와대 음모설을 제기했고, 노 후보 장인의 좌익전력까지 들추며 색깔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노 후보가 “그렇다고 사랑하는 아내을 버려야 하겠습니까”라며 ‘노풍연가’로 받아치자 색깔론은 무력화되었다. 결국 이인제 후보는 중도에 후보직을 사퇴했으며 얼마전 민주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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