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 영향력 감소·지역주의 완화·세대파워

듀카키스 후보(민주당)와 부시 후보(공화당)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88년 미국 대선. 선거운동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어느날 메사추세츠주에서 성폭행사건이 일어났다. 살인죄로 감옥살이중이던 ‘윌리 호튼’이라는 흑인이 주말휴가를 나왔다가 이미 약혼한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것. 이른바 ‘윌리 호튼 사건’이다.

폭로정치, 낡은 정치로 간주돼

그런데 ‘윌리 호튼 사건’은 부시 후보 진영으로부터 “극단적 진보주의자”니 “치유불가능한 좌익분자”니 하며 색깔공세를 받던 듀카키스 후보를 패배로 몰아간 결정적 계기가 됐다. ‘윌리 호튼 사건’ 직후 열린 TV토론에서 듀카키스는 ‘당신의 아내가 휴가 나온 죄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을 받은 듀카키스는 당황한 나머지 얼굴이 발개졌고 답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민주당 전당대회 당시 17% 포인트 차이로 우위를 지키고 있던 듀카키스 후보는 결국 부시 후보 진영의 집요한 네거티브 캠페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88년 미국 대선은 네거티브 캠페인의 ‘효과’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 정치광고의 형태는 1960년에 포지티브 캠페인(93%)이 네거티브 캠페인(7%)을 압도했다. 60년대 이후 네거티브 캠페인은 72년에는 28%, 88년에는 37%를 차지하며 증가추세를 보였지만 90년대 이후에는 다시 줄어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최근 들어 네거티브 캠페인이 증가하고 있지만 큰 효과는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한나라당에서 국정원 도청의혹 폭로를 ‘회심작’으로 꺼냈지만 정작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올리거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을 깎아내리는 데 실패했다는 얘기다. 오히려 ‘폭로정치’ 자체가 ‘낡은 정치’로 간주되는 분위기다. 노 후보가 지난 6일 “폭로·비방전 중단” 선언을 한 것도 그러한 분위기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4월 민주당 국민경선 당시 이인제 후보 진영에서 제기한 음모론과 색깔론이 부메랑이 되어 결국 이 후보의 중도사퇴를 초래해 ‘비정상적인’ 네거티브 캠페인은 이제 ‘약발이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물론 6·13 지방선거와 8·8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부패정권 심판론’ 등의 네거티브 캠페인을 펼쳐 압승을 거두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한발 더 나아가 상대후보인 노무현 후보를 겨냥해 새로운 네거티브 캠페인인 ‘DJ양자론’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지난 11월 28일 국정원 도청의혹 폭로를 시작으로 이미 검증이 끝난 노 후보의 재산문제를 제기하는 등 집요한 네거티브 캠페인을 전개했다. 민주당도 지난 97년 대선 당시 써먹었던 이 후보의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을 다시 끄집어내 맞대응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네거티브 캠페인은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렇게 네거티브 캠페인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이유는 먼저 그동안 여론시장을 독점해온 거대언론 조선·중앙·동아(조중동)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감소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나라당에서 국정원 도청의혹을 폭로하자 조중동은 1면 머릿기사는 물론이고 3∼5면에 걸쳐 한나라당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폭로정치를 매개로 한나라당과 조중동의 연합전선이 다시 구축된 것이다. 한나라당과 조중동 연합의 의도는 분명했다. 도청의혹을 부각시켜 DJ정권을 타격함으로써 노 후보의 지지율을 떨어뜨리겠다는 것. 하지만 12월 초 각 언론사에서 실시한 미공개 여론조사 결과에서 드러난 것처럼 도청의혹 폭로는 표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젊은 세대, 대선이슈를 바꿔놓다

특히 몇몇 전문가들은 올 대선은 종이신문 등 올드미디어(old media) 대 인터넷 등 뉴미디어(new media)의 대결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물론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대결이 전면화한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의 보편화 등이 조중동의 영향력을 급격하게 감소시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미군 장갑차의 여중생 살인사건 무죄평결에 항의하는 촛불시위가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어느 때보다 지역주의가 옅어진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여전히 ‘지역주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민심이 지역감정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지는 않다는 게 중론이다. 시사평론가 이재경 소장은 “네거티브 캠페인도 지역주의가 있을 때 효과가 있는 것”이라며 “3김이 사라지고 지역주의도 옅어졌기 때문에 네거티브 캠페인의 효과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지역주의가 3김정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3김의 영향력이 없다시피한 상태에서 지역주의와 공생관계를 유지해온 네거티브 캠페인은 그 효력을 잃어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세대변수’를 들 수 있다.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20·30대에게 네거티브 캠페인은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 정상호 한양대 연구교수(제3섹터연구소)는 “20·30대는 반DJ나 DJ양자론 등의 네거티브 캠페인뿐만 아니라 노 후보가 옛날 얘기를 꺼내는 것에 대해서도 식상해한다”며 “특히 젊은 세대가 중심이 된 반미시위(여중생 사망사건)는 이념적 공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주축이 돼 도청의혹이나 후보 개인의 재산문제 등의 ‘네거티브 이슈’를 SOFA개정문제 등의 ‘정책적 이슈’(‘한미관계’)로 바꿔놓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나라당은 노 후보의 ‘폭로·비방전 중단’ 선언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검증은 계속해 나가겠다”며 네거티브 캠페인을 계속할 뜻을 내비쳤다. 물론 네거티브 캠페인이 ‘지지층 이탈 방지’라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혹적인 선거전술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비방·폭로 등 ‘비정상적인’ 네거티브 캠페인을 통해 권력을 잡겠다는 것은 ‘21세기다운 선거전략’이 전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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