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충북·제주 문화예술교류 활발한 토론·공연 행사

여기는 제주도 함덕리. 함덕리는 함덕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한때 농수산물 창고였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금은 이 마을 문화사랑방과도 같은 한모살 문화학교에서는 지난 17일과 18일 특별한 무대가 마련됐다. 2006 충북 제주 문화예술교류행사가 열린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먼저 신명나는 가락으로 충북의 예술가들을 환영했다.

▲ 이번교류의 참가자는 총 80여명이었다. 따뜻한 길놀이’에 충북의 예술가들은 국악실내악단 신모듬, 시낭송, 태평소 3도 3성, 가야금 3중주로 화답했다. 소리에 신명이 난 양남준·김복수씨는 함덕리의 일노래 ‘오돌똘기’를 열창했다. 이 마을 최고 명창답게 흰바지에 흰와이셔츠가 멋졌다. 옹기종기 자리를 메운 이 마을 어르신들도 덩달아 어깨를 들썩거린다. 갑자기 관중석에서 앉아있다 태평소를 부는 한 사내가 나타나분위기는 최고조. 게다가 제주도 아이들이 옛 제주도의 놀이와 말을 재현한 ‘고사리꼼짝’을 선보이자 여기저기 박수가 터져나온다. 이날 공연교류 ‘音 좋다’는 제주도 풍물굿패 신나락의 연물놀이와 신모듬의 창룡아리랑으로 무대를 마무리했다. ▲ 서로의 작품을 놓고 토론을 펼치는 모습.
작품을 통해 ‘다름’을 공부하다
2006 제주 청주 문화예술교류는 올해 8회째를 맞았다. 그동안은 ‘제주’,‘청주’라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교류가 펼쳐졌다면 올해는 좀 다르다. 단체중심의 교류에서 마을 주민들과의 친화적인 교류에 중심을 뒀다. 이철수 충북민예총 지회장은 “대중과의 접점을 찾고자 한 실험적인 교류였다. 교류를 통해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고, 그 지역의 문화를 풍요롭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수확이다. 8회를 맞는 만큼 변화를 모색중이고, 올해의 실험을 토대로 다양한 교류형식과 내용을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충북에서는 46명이, 제주는 20~30명 내외의 예술가가 참여했다.

▲ 충북지역 국악실내악단 신모듬의 피날레 공연. 충북과 제주. 먼저 이 둘의 ‘다름’을 찾아보자면 지형적 차이가 떠오른다. 또한 각각 섬과 내륙이라는 고립성 때문에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는 것은 문화교류로서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강점이었다. 김수열 제주 민예총 지회장은 “어느날 뚝딱 교류를 하자해서 8년째를 맞은 것이 아니다. 20년전부터 교류가 있었고, 어느 시점이 돼서 정식으로 행사를 펼친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한해는 제주에서, 한해는 청주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교류행사를 가져왔다. 공연, 전시파트 교류와 역사기행으로 기본 프로그램을 짠다. 그리고 제주에 ‘4.3사건’이 있다면, 충북에는 ‘노근리 사건’이 있기에 이들은 서로의 역사적 아픔을 나누고, 또한 문화적인 ‘다름’을 작품을 통해 공부해나갔다. ▲ 제주아이들의 토속놀이공연은 큰 인기를 끌었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첫 행사도 바로 ‘강심(江心)과 바당(海), 포구에서 만나 꽃피우다’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였다. 강영기 제주작가회의 회원은 ‘도종환의 시쓰기 방향’을, 정민 충북작가회의 회원은 김광렬의 시집 ‘풀잎들의 부리’를 발제했다. 또한 미술파트에서는 김현돈 제주대학교 교수가 임은수씨의 작품을, 김기현 충북민예총 국제교류위원장은 오윤선의 작품으로 본 제주바람의 서정성을 발표했다.

강영기씨는 “도종환의 시쓰기 방향은 역사를 통한 민족의 아픔쓰기, 절망 속에서 사랑쓰기, 삶을 통한 자아성찰쓰기로 진화했다”고 평했고, 정민씨는 “김광렬의 시를 흐느낌, 선비정신, 식물적 상상력, 관조와 설명”이라는 텍스트로 요약했다. 김현돈 교수는 “임은수의 작품은 여성성의 친숙한 아이콘 비단천, 색실, 스티치 등을 차용해 해체와 전복을 꾀하며, 적극적인 자아 탐구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 김기현씨의 평론은 제주바람의 서정성을 부각시켰다.

“충북사람 공연 참 잘한다”
이외에 문학파트는 충북·제주작가회의 공동작품집 ‘새가 살던 집은 낡아도 새집이다’를 냈고, 미술파트는 한모살 문화학교에서 ‘한모살에 부는 솔바람’전을 열었다. 충북작가 26점, 제주작가 15점이 전시됐다.

이번 교류를 총 지휘한 충북민예총 예술사업 위원장 조동언씨는 “이번 교류가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짓는 모델이 됐다. 모든 문화행사는 대중과, 좋은 프로그램이 함께 준비돼 있어야 한다. 행사를 기획하면서 함덕 주민들이 어떤 공연프로그램을 좋아할 것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단체간의 교류가 아닌 주민들간의 교류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고 평했다.

예상대로 함덕 주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연내내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함덕리 이장 고두철씨는 “행사가 이렇게 좋을줄 알았으면 더 많이 광고할 것 그랬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또 마을 주민 이은용(59)씨는 “충북사람들이 공연 참 잘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주와 청주의 문화짝짓기는 ‘거품’을 뺀 작은 단위 교류였기에 ‘알찬 성공’을 거둔셈이다.

□인터뷰/ 이철수·김수열 지회장 “올해 가장 이상적인 행사였다”김수열 제주민예총지회장(사진 오른쪽)은 시인으로, 이철수 충북민예총 지회장은 판화가로 유명한 예술가다. 김지회장은 최근 4.3사건을 형상화한 ‘바람의 목례’를 펴냈다. 그는 “올해 행사는 가장 이상적인 행사였다. 함덕 주민들과 함께 문화를 나누었다는 것이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 이철수 충북민예총지회장(왼쪽)과 김수열 제주지회장.

이지회장은 “함덕은 농경노동문화가 발달된 지역이라 공동체의 신명을 품고 있다. 노동과 예술이 분리되기전 대중과 예술은 가까워졌지만 오늘날은 서로 멀어져 그 간격이 크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철수 지회장은 이날 함덕리 주민들에게 전시했던 판화 한점을 기증하기도 했다.


▲ 행사가 열렸던 함모살 문화학교 전경. ● 함덕리는…“국회의원보다 이장님이 서열 높아요”함덕리는 국회의원보다 이장님의 권력서열이 더 높은 동네다. 마을 행사가 열리면 식순에 의해 소개하는 사람은 오직 이장님 한분뿐이라고 한다. 제주공항에서 가장 인근에 위치하고, 함덕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지역이지만, 사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삼벌초의 항쟁지였고 또한 4.3사건의 피해지이기도 하다. 4.3사건 당시 대대본부가 주둔하고 있던 터라 이 주변은 학살터가 곳곳에 있다. 함덕해수욕장은 전국에서 유일한 ‘함덕리 소유지’로 이 곳 주민들의 높은 주체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곳도 외부자본이 유입되고 있어 정체성을 잃어버릴까봐 고민중이라고 한다. 또한 함덕리는 단위부락 단위로는 전국 최대규모로, 2250여가구 7천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국회의원선거보다 더 치열한 이장선거에서 재선한 고두철씨는 유급보좌관 4명이 수행하고 있으며, 또한 5구장을 통솔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구대표 아래에는 청년연합회, 부녀연합회 등이 구성돼 있다. 고 이장은 “무엇보다 경로효친 사상이 ‘으뜸’인 동네”라고 자랑했다. 또한 이장장이 열리는데, 이날 갑자기 역대 이장님 한분이 돌아가셨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 4.3평화공원 추념공원에서 묵념하는 모습.
■4.3평화공원…만사천명여의 위패 봉안

제주도 4.3사건은 미군정에 의한 대량 민간학살이라는 어두운 역사적 진실을 갖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된 것은 10년전쯤이다. 그동안 이곳 주민들은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연좌제에 묶여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제주는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제주 4.3사건을 재조명하고, 또한 국비 993억원을 들여 12만평 부지에 4.3평화재단을 수립중이다. 단계별로 공사가 진행중인데 현재 위령제단, 위렵탑등이 조성됐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곳은 해발 430m이고, 또한 동부산업도로에서 이곳까지 거리도 4.3km라고 한다. 제주민예총은 94년부터 매년 이곳에서 ‘제주 4.3예술제’를 개최하며 예술로 그들의 혼을 달래고 있다.

또한 국무총리 산하 4.3 사건 진상규명 명예회복위원회와 도 실무위원회가 구성돼 있다. 강덕환 제주작가회의 회원이자 제주도 의회 4.3피해상담실의 유일한 계약직 공무원이라는 그는 교류의 마지막날 역사기행 해설을 맡았다. 그는 “처음에는 이 넓은 땅에 위폐보관소가 겨우 10평 규모였다. 시민단체들의 항의로 지금은 100평규모로 마을이름과 피해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하지만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아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라고 입을 열었다. 또 가나다순으로 표기돼 있어, 부부의 경우 이름이 떨어져 있다고.

   
▲ 4.3평화공원 100여평공간에 희생자들의 위패들이 마을별로 모셔져있다.
4.3사건이 발생한 1948년 당시 제주도 인구는 약 27만 6천이었다. 2000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4.3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아직 접수가 다 진행되지 못했다. 어린아이들은 미처 호적등록이 돼 있지 않아 숫자에서 빠졌다는 것. 현재 등록한 숫자는 14028명이다. 민간단체인 4.3연구소는 피해자의 18%만 접수됐다고 추정하고 있다.

4.3사건은 1947년부터 54년 9월 21일까지 일어난 미군정에 의한 ‘빨치산 타도’라는 미명아래 펼쳐진 대량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미군정-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한 제주도민을 대량학살로 몰아간 것이다.

강씨는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지리적 독립성과 수탈로 인한 저항성을 갖고 있다. 실제로 빨치산들은 300~400명 정도가 있었다”라고 부연설명했다. 4.3사건은 영동 노근리의 학살, 보도연맹사건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 지역 출신 작가들이 아픈 역사를 떠안고 살며 평생 이를 알리고자 한 것은 하나의 숙명이었다. 강씨는 “소설가 현기영씨의 고향이 이곳 노형리었다”며 그가 처음 1978년 제주도 4·3사건을 작품화한 중편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또한 “4.3특별법 개정안은 지금 국회에서 잠들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