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후반 사회운동 투신,
진보세력 아울러
언노련·민노총 초대위원장… 97년 대선 출마하기도
곤궁한 성장과정 속 서민적 소탈함과 감성 몸에 배

권영길후보(61)는 언론인과 노동운동 지도자를 거쳐 이번 대선에서 진보진영의 대선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 권후보는 97년 대선에서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진보적 시민단체가 결성한 ‘국민승리 21’의 후보로 출마해 국가보안법 철폐, 재벌 해체 등 진보적 공약을 내걸고 선거전을 치른 결과 30만 6026표(1.2%)를 득표했다. 두 번째 대권도전에 나선 권후보는 경남 산청에서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나 부산 경남중, 경남고를 졸업했다. 권후보는 TV토론회에서 부친 권우현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 시대의 불행한 과거였다고 생각합니다” 부친 권씨는 지역에서 신망이 높은 인물이었고 대농(大農)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세가 기울어 직접 농사를 짓고 살았다.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부친 권씨는 마을 유지들과 동네에 학교를 세울만큼 지역에서 영향력이 높았다. 하지만 부친이 빨치산이 되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가족들은 곤궁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장남인 권후보는 부산의 작은아버지 집에서 자랐고 여동생 2명은 초등학교만 겨우 마칠 정도로 어려웠다. 부산에서 고교를 마친 권후보는 서울대 농대에 입학한뒤 어렵게 공부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야학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당시 궁핍했던 권후보에게 붙여진 별명은 ‘똥구두’였다. 가난한 고학생이 지저분한 신발을 신고 다니면서 얻은 별명이다. 하지만 권후보는 야학활동을 하면서 평생의 반려자가 된 부인 강지연씨를 만나게 된다.
특히 강씨는 삼성생명의 전신인 동방생명 창업주의 무남독녀로 알려져 ‘재벌가 딸’과 ‘빨치산 아들’의 특별한 인연으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부인 강씨는 언론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이화여대 1학년때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사업도 정리되고 집안도 어려워졌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남편을 만났고, 그 분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모든 것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고 술회했다. ‘산처럼 생각했던’ 아버지를 여의고 ‘산같은’ 남편을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권후보는 대한일보를 거쳐 당시 친정부 신문인 서울신문에 입사했다. 진보세력의 중심에 있는 그가 관제신문에 오랫동안 몸담았다는 것은 다소 의외다. 이에대해 부인 강씨는 “그때는 동아일보 외에는 모든 신문의 내용이 다 똑같았다. 남편은 단순히 신문사 안에서 힘들어했다기 보다 이 사회의 문제를 생각하고 바뀌어야 한다고 고민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신문사 일을 말리지 않았고 이후 남편이 걷는 길을 반대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서울신문 파리특파원을 지낸 권후보는 87년 민주화의 바람이 몰아치면서 지식인의 사회참여 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다. 당시 한국기자협회 실무자로 민주화교수협의회, 민주화변호사협의회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전개되면서 언론사에도 노동조합이 설립됐고 권후보는 지난 88년 전국언론노동조합총연합의 초대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언노련을 통해 언론민주화에 큰 성과를 남긴 권후보는 96년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돼 명실상부한 노동계의 얼굴로 떠올랐다. 지식인 출신의 노동운동가로써 전체 노동계를 아우르는 지도력을 발휘한 것은 특별한 평가를 받을만 했다.
권후보는 97년 국민승리21을 통해 대선에 출마했고 민주노동당을 창당, 2000년 4·13총선에서 노동후보의 원내진출을 위해 직접 경남 창원에서 출사표를 던지는 과단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권후보는 모신문사 설문에서 학창시절의 꿈을 ‘사회운동가(농민운동)’로 답하고 학창시절의 가장 기억에 남는 일에 대해서는 ‘학생회장 선거 출마의 변으로 전교생 울린 일’이라고 적었다. 권후보는 부드러움속에 때를 기다려온 진보세력의 ‘준비된 대통령 후보’라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인물평이다.

권영길 후보를 말한다

“발걸음이 늘 한결같은 사람”
6·29 전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함께 활동하며 만나

권후보와 인간적인 교분을 가진 지역인사를 찾기가 쉽진 않았다. 97년 대선을 함께 치른 민노총 지역본부 활동가들도 있지만 권후보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아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찾았다. 결국 80년대말 지역 민교협 활동을 이끌었던 유초하교수(충북대 철학과)를 만나 인터뷰를 청했다. “내 형님이 권후보와 서울신문 입사동기였다. 그로인해 맺어진 인연은 아니었고 6·29 전후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교수, 변호사, 언론인들이 함께 활동하면서 만나게 됐다. 민노동 정강정책 수립 때 나도 참여해 함께 연구했으나 진보진영의 동지인 셈이다”
유교수는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정당득표율 8%를 득표한 민노당이 권후보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 2∼3%대에 머문 것에 대해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의 역풍으로 권후보가 다소 손해를 본 것일 뿐, 후보자 개인역량으로 평가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사실상 민노당에서 보다 더 경쟁력있는 후보가 있는가? 단병호 전 위원장이 현장노동자의 대표성은 있지만 법적문제로 출마자체가 어려울 테고… 난 권후보가 늦은 40대 나이에 사회운동에 뛰어들어 10여년 동안 한눈 팔지 않고 집념을 키워온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이번 대선결과를 떠나 2년 뒤 총선에선 민노당의 정당득표율이 10%는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권후보와 사적인 자리도 많았던 유교수에게 그의 인물평을 부탁했다. “우선 소탈하고 감성적이고 맘이 여린 분이다. 80년대말 민교협, 민변과 일할 때도 투쟁적 실천방안에 대해서는 머뭇거리는 입장이었다. 체질적 온건성을 가진 분이고 그런 점이 대통령 후보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후보 지지층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은 보수당이고 한나라당은 수구정당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노후보를 놓고 건강한 보수를 지지하느냐, 진보를 지지하느냐의 선택에 기로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이 결국 진보라는 역사적 과업을 더디게 해왔다. 보수적 권력집단에 의존해 진보의 입지를 확보하려 했던 전략이 과오로 판명된 셈이다. 독자성을 유지해야만 결과적으로 더 큰 몫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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