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충실한 모범생, 대쪽 법관으로…
청주중 1년 재학… 잦은 이사로 친구 사귀기 힘들어
대법관 시절 소수의견 최다… YS에 맞서 총리직 사퇴

이회창후보는 1935년 황해도 서흥에서 검사서기였던 이홍규씨의 4남 1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후보는 부친의 전임지를 따라 이사가 잦았고 유년시절(초등학교)을 전라도에서 보낸후 청주중·경기중을 거쳐 경기고를 졸업했다. 해방후에 검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 47년 청주에서 1년간 생활했다. 이때 학연으로 청주중 24회, 청주고 26회 동문회에서 명예 졸업생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후보의 소년기 회고담 가운데는 ‘가출 사건’이 바로 청주중 재학당시 벌어진 일이다. 학교 수학시험 점수가 형편이 나오자 심적 부담감 때문에 집에 들어가질 못했다는 것. 혼자 몸으로 조치원쪽으로 무작정 걸어가다다 결국 밤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평소 ‘범생이’(모범생)였던 아들이 사라지자 집안에 난리가 났던 것은 뻔한 일.
이후보와 청주중 1학년 생활을 함께 한 지헌정씨는 “몸가짐이 흐트러지지않고 조용한 친구였다. 하지만 공부도 잘했고 체육활동도 적극적이었다. 키는 작고 얼굴은 하얀 귀공자 타입인데 키 큰 친구들과 농구를 즐겨했다. 남에게 부담주지않고 자기 일에 성실한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6번의 이사와 3번의 전학을 했던 이후보는 환경적응과 친구 사귀기가 고민거리였다. 청주에서 경기중 2학년 전학후 ‘촌놈으로 얕잡아 보일까봐 힘을 잔뜩 집어넣고 다녔다’고도 한다. 툭히 가방이 땅에 닿을 듯했던 단신의 콤플렉스를 떨쳐버리기 위해 농구, 축구, 야구 등을 닥치는대로 했다는 것. 이후보는 모신문의 신상질문에서 학창시절 성적을 ‘중위권’으로 답했으나 경기고 졸업후 서울대 법과대에 입학, 부친의 뒤를 이어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다.
학창시절의 꿈은 ‘화가, 역사연구가’였으나 지난 93년 김영삼 정권당시 감사원장에 임명되기 직전까지 30여년간 판사, 대법관으로 재직했다. 이후보는 서울대 재학중인 57년 고시 사법과(8회)에 합격했고 엘리트 법관코스를 밟아 81년 동기생 가운데 선두주자로 대법관에 임명됐다. 물론 전두환 군사정권 때였지만 이후보는 ‘당시 계엄해제하에서 군사재판권 연기규정은 위헌’이라고 소수의견을 낸 것’이 평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고 있다. 실제로 이후보는 대법관 시절 총 40차례의 전원합의 판결에 관여, 이 가운데 13번의 소수의견을 낸 소신파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보적 언론이었던 민족일보의 반공법 사건에 배석판사로 참여해 사형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후보는 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쳤고 28세때 부인 한인옥씨를 중매로 만나 결혼하게 됐다. 당시 부인 한씨의 부친은 대법관이었고, 경성사범 출신의 어머니를 비롯해 집안과 학벌이 결코 이후보에 뒤지지 않았다. 특히 청주 한씨 집안인 부인 한씨는 지난해 문중 시향에 직접 참석하는등 청주 표밭갈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청주 한씨 시향에는 올해 민주당 한화갑 대표도 참석했지만 대통령후보 부인에 대한 관심도가 더 높았다는 후문. 어쩌면 당시 대선주자에 대한 청주지역 여론이 문중행사에 그대로 투영됐을 수도 있다. 전주 이씨인 이후보는 97년 대선때부터 종친표를 다져왔다. 하지만 당시 같은 종친인 국민신당 이인제후보가 동반출마하는 바람에 표쏠림이 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는 자민련에 입당한 이인제 총재 권한대행이 이회창 지지를 공식선언할 것으로 보여 전주 이씨 종친표 결집이 수월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종친회 공략에 대한 연고주의 선거운동에 대해 반발도 만만치않다.
이후보는 지난 2000년 8월 종친회 수련회에 참석해 “전주 이씨 가문은 이미 나라를 세워 500년간 경영을 해온 경험이 있다. 전주 이씨 문중이 다시 국가와 나라를 세우는데 주춧돌이 되자”고 언급했다가 ‘지역갈등도 모자라 씨족갈등까지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회창 후보를 말한다
“원칙을 지킬줄 아는 정치인”
서울대법대 동기중 대법관 1호 승승장구 모습 지켜 봐

청주에서 중학시절 1년간을 보낸 이후보는 이후 청주 친구들과 교분을 이어가진 못했다. 하지만 정치입문 이후 청주를 방문하면서 옛 친구들과 회동하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다행히 서울대 동문으로 정·관계에서 인연을 쌓아온 충청대학 정종택학장이 가시권에 떠올랐다. “나와는 서울대 동기이며 고교동문회에서도 명예졸업생으로 인정하고 있다. 대학시절에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제대로 학교를 다닐 형편이 못됐다. 따라서 학창시절의 이후보에 대해 뚜렷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법대동기 가운데 대법관 1호로 임명되는등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정학장과 이후보가 업무적으로 접촉하게 된 계기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재직시 민정당 소속 예결위원장을 맡았던 정학장이 판공비를 공식예산에 편성토록 편의를 제공한 것. “중앙선관위장이 판공비 한푼없이 전국 조직을 어떻게 관리하겠는가? 당시 선관위 관계자가 뜻을 전해오길래, 흔쾌히 동의하고 연간 3000만원을 판공비로 책정토록 했다”
이후 김영상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맡다가 YS와 갈등으로 사임하면서 이후보는 DJ가 없는 이기택 체제의 민주당 내부에서 97년 대선후보로 거론됐었다는 것. 정학장은 97년 대선관련 정치비사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때 민주당 김충환, 이부영의원 등이 YS와 맞서면서 국민적 인기가 상승한 이후보를 민주당 대선후보로 옹립하는 문제를 나와 상의했었다. 이후보와 만나 상의했는데, 민주당은 이기택총재가 반대하면 곤란하고 만약 YS가 삼고초려하면 거부하지 마라는 취지로 조언했었다. 결국 민주당에서 안됐고 YS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가 됐었다”
97년 대선 와중에도 정학장은 이후보에 엄청난(?) 지원작업을 결행했다는 것. “이인제후보가 등장하면서 대선판도에 이상이 생겼다. 결국 이후보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인제를 중도포기토록 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국회의장까지 지낸 중진 L의원과 함께 대구에서 이인제의원을 만나 적극 권유했지만 안됐다” 하지만 3년 뒤 정학장은 민주당 후보로 청원군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이후보의 측근인 신경식의원에게 석패하는 아이러니한 정치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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