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하는 군함의 함장, 김종필
김영삼, 언론 외면 속 ‘창 지지’

2002년 대선에서 떠오른 별은 누구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일 것이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대선정국의 변방에 있던 두 사람은 이제 한국정치를 이끄는 정치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격변의 연속이었던 올해의 대선정국은 이처럼 새로운 별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반대로 정치권의 여러 별들이 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침몰하는 군함의 함장, JP

지금 가장 속을 태우고 있는 사람은 아마 JP(김종필 자민련 총재)일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캐스팅 보트를 꿈꾸며 재기 의지를 불태우던 그는 지금 갈 곳없는 군소정당의 총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6·13 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이 패배한 후에도 그의 재기 의지는 단호했다. 불과 한달 전만해도 그의 입에서는 “이대로 주저앉지는 않겠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며 “내각제를 위해 남은 생을 다 바칠 것”이라는 각오가 나왔다.
JP는 캐스팅보트의 꿈을 이루기 위한 길을 끊임없이 타진했다. 한때는 이회창 후보와의 연대도 검토해본 적이 있었고, 정몽준 대표와의 연대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JP에게 만족할만한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지지하지 않고 이인제 의원 등과 함께 ‘중부권 신당’을 만들어 17대 총선에 대비하는 것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역시 모두가 주저하여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더 이상 선택치가 없어지고 말았다. JP의 성향상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설사 그런 일이 있더라도 노 후보 자신이 JP의 지지는 사양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남은 길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아무런 조건이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하고 있다. 그래서 JP는 며칠전 이런 말을 했다. “함장은 항상 군함과 함께 바닷속으로 들어가 장렬하게 죽는 법”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탄 군함이 침몰할 수밖에 없음을 각오하고 있는지 모른다.
YS(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이번 대선을 통한 재기를 불태우던 인물이었다. 노풍(盧風)으로 지지율이 정점에 올랐던 노무현 후보가 자신을 찾아갔을 때, 그는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대선 정국의 추이를 끝까지 지켜보고,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선택을 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는 더 이상 좀처럼 오지 않았다.

YS의 고독한 결단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YS를 찾아갔다는 이유로 급락한 이후, YS는 구애(求愛)의 대상이 아니라 피해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와의 연대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던 한나라당도 더 이상 그에게 공개적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YS의 등을 돌리게 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나서서 요란하게 그와 손잡는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 YS는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야당인 한나라당이 승리하는 것이 순리”라며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그것도 국내언론도 아닌 외국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그의 지지 선언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신문의 한 구석에 그냥 묻혀버렸다.
이회창 후보를 향해 “인간이 먼저 돼야 한다”는 독설을 내뱉던 YS의 기세등등한 모습을 기억하면, 그의 아무런 조건없는 이회창 후보지지 선언은 자신의 자존심을 거의 포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세태의 변화를 실감케한 것은 한나라당의 반응이었다. YS가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했음에도 정작 한나라당은 조용했다. 물론 잘된 일이기는 하지만, YS가 지지했다고 해서 요란을 떠는 것이 선거전에 득이될 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올해 초까지만해도 YS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큰 신경을 쓰던 한나라당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하늘에서 지하실로 추락한 이인제

올해 하늘에서 지하실로 추락한 정치인은 역시 이인제 의원이다. 올해 초만하더라도 그는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감이었다. 이인제 대세론이 자리하는 가운데, 그 자신은 경선에서 패배하는 상황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국민경선에서 그는 노무현후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인제 의원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패배를 마음속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노 후보의 손을 들어주는 대신, 경선불복의 길을 택했다. 그는 국민경선 이후 줄곧 노무현 후보와는 다른 길을 갈 방법을 찾는데 골몰해왔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갈 곳이 없게 되었다. 노무현 후보로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졌지만, 그에게 협력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은 너무도 굴욕적이다. JP 가 제안한 중부권 신당에 나서는 것도 자칫 정치권의 미아가 되어버릴 위험이 크다. 그래서 그는 그냥 민주당에 남아있겠다고 했다고 한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 탈당은 안하지만, 노 후보에게 협력할 생각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인제 의원이 독자행보에 끝내 나서지 못했던 근본 이유는, 그의 주가가 너무 추락했기 때문이다. 특히 거듭되는 경선불복의 모습에 대해 여론의 냉담한 시선이 확산되었으며, 그의 운신의 폭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인제 의원이 경선에 승복하고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주며 전국을 누볐다면 그의 정치적 위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지금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허주(虛舟)의 백기투항

김윤환 민국당 대표는 29일 당무회의를 소집, 당 해산을 공식 선언하고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한다. 지난 16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와 갈라선지 2년10개월만의 일이다.
당시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한 김윤환 대표는 “이회창 총재가 한 짓은 한마디로 패륜적 행동이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 총재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총재가 나에게 민주발전을 위해 정열을 바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마련해 줬다고 생각한다”며 재기를 기약했다. 그러나 그는 16대 총선에서 낙선하여 원외 인사로 머무는 신세로 전락했다.
자신을 버린 이회창 후보를 향해 그같은 분노를 표현하던 김 대표가 결국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한 것이다. 그것도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보장이나 대가없이 말이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일방적인 백기투항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반(反)이회창 진영의 단일후보가 노무현 후보로 정리된 상황에서, 김 대표로서는 노 후보를 지지할 수도 없고, 결국 굴욕을 무릅쓰고 한나라당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 것이다.
과거 한국정치를 막후에서 주무르던 김 대표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의 선택은 너무도 초라해 보인다. 이제는 정치적 자존심을 모두 접고 생존에 급급해야 하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16대 대선에서 ‘지는 별’이 이들만은 아니다. 사상 유례없는 철새 행각을 벌인 정치인들. 여기서 그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지만, 머지 않아 우리 정치권에서 ‘지는 별’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16대 대선은 알게 모르게 우리 정치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부정하던 여러 정치인들이 이제 화려한 무대에서 하나씩 사라져가고 있다. 그 흐름을 막으려는 온갖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결국 변할 것은 변하고야 말 것이다. ‘3김정치’로 표현되던 한 정치시대가 마감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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