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 이상형, 왜 ‘육영수 여사’인가

본격적인 선거국면에 접어들면서 언론은 대선 주자들의 동선 하나하나에 모든 촉수를 세우고 있다. 연일 신문 1면과 종합면은 대선 주자들의 대선 전략과 하루 동선 읽기로 도배질 되고 있다.
더구나 합종연횡을 둘러싼 세 불리기, 대선 주자들의 경쟁자의 부당함을 이용한 자신의 정당성 쌓기 전략, 소소한 당파 대립 등 정치판의 일거수 일투족이 영양가 풍부한 정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방송의 행태 역시 대동소이하다. 오히려 대선 주자들의 하루 일과를 시청자들에게 보고하는 형식의 보도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는 스토킹의 강도가 더 크지 않나 싶다.

3대 방송사가 영부인상 검증?

방송의 카메라는 대선 주자들의 공식적 일정에 만족하지 않고, 후보들의 집안 구석구석을 훑고 다니며 가장 내밀한 개인의 영역까지 들춰내기도 한다. 가장 내밀한 장소인 침실도 거리낌없이 공개되며 옷장의 내부, 심지어 냉장고 안의 음식 보관까지 모두 알찬 정보들이다.
방송은 예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사생활 들추기를 후보 검증 단계라는 논리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간다. 시청자들, 유권자들의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선택을 위한 선결조건이라는 단서를 두면 카메라가 담아내지 못하는 영역이 없을 정도이다.
10월 중반에 접어들면서 대선의 분위기가 구체적으로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매체들의 이목이 집중된 대상은 단연 대선 후보들의 부인들이었다. 특히 방송의 지대한 관심과 일방적 애정공세는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치졸하고 유치했다.
3개 방송사는 경쟁적으로 그녀들을 아침 주부 대상 프로그램에 섭외하는데 열을 올렸고, 바람직한 영부인상을 검증한다는 식의 기획의도를 밝혔다.
SBS <한선교 정은아의 좋은 아침>은 권양숙씨(10/29), 김영명씨(10/30), 강지연씨(11/5), 한인옥씨(11/13 출연)를 초청해 부인들의 목소리를 듣었다. MBC 역시 <시사 매거진2580>에서 지난 10월 20일 김영명씨를, 27일 권양숙씨를 인물탐구 형식으로 보도했다.
또한 <뉴스 투데이> ‘박영선의 사람과 세상’(수/목 오전 7시 45분)은 지난 10월 16일부터 대통령 부인들을 잇따라 초청해 교육관이나 가정생활 등을 알아보고 있다.
KBS 역시 1TV <아침마당>에서 11월 18일부터 21일까지 각 후보 부인들을 초청해 대담을 진행했다. 활자매체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한매일에서 지난달 5, 7, 10일 ‘대선후보 부인에 듣는다’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대선 주자들에게 보인 언론의 과잉된 관심과 보도량에 비해 다소 그 비중이 적긴 하지만 후보 부인들에게 내비치는 언론의 관심과 주목은 일면 긍정적으로 보인다. 유권자들의 알 권리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일국의 대통령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제거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녀들에 대한 정보는 질과 중요성의 여부를 떠나 유권자들의 선택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합리적인 오류를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 중요한 점은 영부인이 대통령의 비공식 제1참모이자 러닝메이트라는 개념에 있다.
잘 알다시피,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부인인 힐러리는 남편의 그늘에서 백악관의 안주인의 역할만을 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보육·의료보험 개혁정책을 직접 관장하는가 하면 클린턴의 정치적 파트너였다. 선거과정에서 빌 클린턴이 “나를 뽑는다면 대통령 둘을 얻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일화는 일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힐러리가 보인 정치적 행보는 남편의 퇴임 뒤에 더욱 빛을 더해, 뉴욕 상원의원의 자리를 거머쥐는 독자적 정치인의 면모를 보였다. 며칠 전에 치러진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엘리자베스 돌 역시 남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공화당의 상원 의원이 됐다. 그런데 이렇게 똑똑하고 유능한 영부인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찾아보기 힘들다.
언론은 하나같이 같은 잣대로 그녀들을 재단하고, 동일한 그릇에 담아 평가하려 한다. 너무 짧거나 길면 잘라내야 하고, 모나면 닳아 둥글게 만들어야 한다. 그릇에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도 정답이 아니며, 너무 튀지도 너무 모자라서도 안 된다. 언론은 적당히 우리 시대 평균치의 여성을 모범적인 영부인상으로 제시한다.
그녀들과의 대담은 결혼생활, 남편과의 연애, 아이들에 대한 교육관, 살림솜씨, 내조법 등 다분히 신변잡기적이고 개인 신상에 치우친 주제들로 메워진다. 방송의 횡포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사생활 들추기도 심각한 수준이다. 미리 일정을 맞추고 녹화를 한다는 점을 감안해도, 집안까지 찾아가 구석구석 먼지하나까지 잡아내는 행태는 연예프로그램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들게 할 정도이다.
더군다나 그녀들을 가정의 공간으로 위치 지어놓고, ‘내조자’ 내지 ‘청와대의 안주인’으로 한정짓는 모습은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그녀들도 대외적으로 활발한 사회생활을 하고, 사회적 지위도 가지고 있을 터인데 가정안으로 그녀들을 묶어 두는 접근 방식은 우리 언론의 가부장적 시선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언론의 두 얼굴이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 쪽으로는 여성의 인권과 양성평등을 얘기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활약은 가정내의 안정과 평화를 지탱하는 아내로서의 역할이 수행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대 역행하는 잣대 들이대는 언론

언론이 유포하는 영부인의 덕목 역시 정치적 역할과 사회적 책임감, 사회 전반에 대한 인식수준이 아니라 알뜰한 살림솜씨, 남편에 대한 내조, 아이들에 대한 풍부한 모성이다.
우리 속담에 ‘베갯밑공사’라는 것이 있다. 잠자리에서 아내가 바라는 바를 남편에게 속삭여 청한다는 뜻이다. 사극이나 역사 드라마를 보면 조선시대 수많은 국왕들이 후궁들의 ‘베갯밑공사’ 즉, 개인의 욕망과 권력욕으로 인해 엄청난 살육과 피를 부르고, 수많은 정치적 실정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영부인의 역량과 자질, 인물 됨됨이와 세계관, 사물의 배면을 뚫어보는 시각이 직간접적으로 대통령의 업무수행과정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그 만큼 영부인의 공적 영역에서의 역할과 자질이 중요함에도 여전히 언론은 시대에 역행하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필자는 지지자도 많고 적도 많은 영부인을 원한다. 육영수 여사처럼 모든 국민들의 사랑과 신뢰를 한 몸에 받은 인자한 모성의 어머니가 아니라, 잔 다르크 같은 열정과 리더십을 가진 철의 여인을 원한다. 적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분명치 않고, 뚜렷한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육영수 여사가 그랬다. 그녀의 국민장이 치러질 때 반도 전체가 눈물 바다가 되었다고 하니, 분명 그녀는 국가의 어머니였음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실정과 정치적 과욕을 잡아주고, 한국 사회가 민주화로 나아가는 데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사랑과 모성의 어머니로서, 그녀의 역할은 남편의 잘못 쥐어진 칼자루를 고쳐주기 보다는 칼자루가 지나간 자리의 아픔을 달래주고 피를 닦아주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힐러리 같은 적도 많고, 욕도 많이 먹는 영부인을 바라는 것은 요원한 것일까. 나는 하나같이 인자한 웃음을 띠며 육영수 여사의 모습을 닮으려는 그녀들의 속내가 읽혀져 불편하다. 분명 그녀들 중에는 힐러리에 버금가는 사회적 능력과 자질을 가진 이가 있을 텐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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