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본선이 불과 이십여일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12월 달력 한 장을 바라보며 2002년 한 해는 온통 선거, 정치얘기만 하다가 마감되는 해로 기억되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온 국민을 흥분케 한 월드컵 축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대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의 역점꼴은 ‘반전의 묘미’가 내뿜는 짜릿함이란 차라리 가슴을 시리게 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해준 경험이었다. 싸아해지는 전율같은 것, 마치 붉은 함성이 토해내는 氣와 절절한 염원이 神을 감동시켜서일까 ? 하는...
올 한 해 나는, 정치와 정치인을 향한 무수한 비난과 냉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침신문에 오르는 정치기사를 보면서 한밤중엔 수많은 익명의 동지들과 인터넷으로 정치개혁을 열망해왔었다. 처음부터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반전의 묘미’가 녹녹했던 대선 예선전을 지켜보면서 결국 모든 판세를 좌지우지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청와대도 아니요. 神도 아닌 바로 내가 포함된 국민의 뜻, 여론이라는 사실에 나의 한표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기본적으로 투표를 해야한다. 정치적 주권자로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막대한 권리와 의무가 바로 나에게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제대로 행사해야할 것이다. 잘못 쓴 칼은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를 선택해야 하나? 고민하는 유권자에게 시민단체는 후보가 내세운 공약과 정책을 상세히 살펴보라고 권유한다. 각 분야에서 주장하는 정책에 어느만큼 근접해 있는가를 꼼꼼히 체크해보고 공약비교표를 통해 점수를 매겨보라고 한다. 여성운동분야를 보면 각 후보들에게 요구하는 3대 핵심공약과제가 있다.
첫 번째는, 호주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신분등록제도를 마련하여 평등한 가족문화를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다. 3살짜리 손자가 할머니의 호주가 되고,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호적을 파서 남편쪽으로 옮겨야 하며, 이혼한 뒤 재혼한 엄마가 아이랑 함께 사는데도 주민등록상에는 동거인으로 표기되는 호주제는, 부질없는 남아선호사상을 부추켜 연간 2만명이나 넘는 여아낙태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비정규여성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여성들이 평등하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여성 노동자의 73%가 비정규직으로서 남성과 똑같이 일하고도 월급은 절반이요. 각종 사회보험이 제외된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처지이다. 세 번째는, 국공립 시설을 확대하고 가구소득에 따른 차등보육료제를 도입하여 누구나 안심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산율 1.3명, 아이 안낳기로 유명한 프랑스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 얘기이다. 아이 낳는데도 돈이 들지만 양육비와 육아조건은 더 열악하다. 비용, 시간, 시설환경 등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보육시설의 부족과 사회적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절실한 여성들의 요구에 대해 후보들이 약속하는 내용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여성정책에 관한 한 후보자간에 변별력을 갖기가 어렵게 각자 잘해보겠다는 것인데 (호주제만큼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정책의 지엽적인 차이를 보통의 유권자가 가려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유권자들에게 제안한다. 각 분야의 정책비교표도 중요하지만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견지해야 하는 더 큰 줄기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 최고의 기준이란 우리시대 최고의 소명, 다름아닌 한반도의 평화공존과 남북 상호이해를 통한 민족화해작업을 지속화시켜낼 수 있는 가치관과 능력이 아닐까 ? 또한 해방후 반세기가 흘렀지만 손대지 못한 민족정기회복과 역사바로잡기같은 나라의 법통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일야말로 현재 각 후보가 내뿜고 있는 갖가지 화두인 부정부패 청산, 낡은정치와 지역감정 타파, 경제회생등에 앞서 선행돼야 할 기본작업이다. 그러므로 평화통일세력이냐, 수구냉전세력이냐? 친민족정기 회복이냐, 친일 잔재냐? 다소 고답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이 의제야말로 왜곡된 50년의 역사와 전쟁위협이 도사리는 한반도 정세를 바로잡는 선택의 큰 줄기임에 틀림없다. 사람답게 아이 좀 편히 낳아 기르고 싶다는 여성들의 구체적 요구만큼이나 말이다. 2002 12월 19일, 새천년 처음 치뤄지는 대선, 국민의 절절한 염원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역사를 반전시켜낼 수 있는, 그래서 그 기막힌 묘미를 우리 모두 다시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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