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투혼 14번 입후보해 5번 당선 보좌진을 형제처럼 40여 년 동고동락

   
“오늘 이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오로지 보은 옥천 영동 군민들, 그리고 충북 도민들의 성원 때문임을 잘 알고있습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17대 국회 후반기 부의장으로 내정된 이용희 국회부의장의 소감은 고향에 감사하는 것으로, 뜻밖에도 담담하기만 하다.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하여 고배를 마신 것을 시작으로 50년 가까운 정치역정 끝에 오른 영광의 자리이지만 이부의장은 도리어 자신의 이름이 클로즈업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언제부터인가 국회의장은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맡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왔다.

경상도에서 대통령이 당선되면 전라도에 국회의장을 주고 전라도에서 대통령이 당선되면 경상도에 국회의장을 주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 온 것이다. 그런 지역고려로 본다면 국회부의장 1석은 늘 ‘무대접론’이 잠재해 있는 충북의 위상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이부의장은 1985년 12대 국회 때 부의장에 내정이 돼 있었다. 그러나 국회선출 과정에서 그의 명성을 시샘한 신 군부의 실세가 고약하게도 방해공작을 해 부결을 당한 일이 있다. 절치부심, 그로부터 21년만에 뒤늦게 나마 다시 그 자리에 올랐는데 감회가 왜 없겠는가.

이용희 부의장은 한마디로 ‘끈질긴 사람’이다. 약관 28세의 나이로 충북도의원에 당선됐던 그는 46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숱한 고난과 싸워 온 우리 정치사의 흔치 않은 산 증인이다. 총 14번 출마해 9번 낙선을 하고도 5번 당선(도의원 포함)됐으니 그 생명력이 인동초(忍冬草)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부의장은 1931년 6월 옥천군 안남면 심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안남국민학교를 나와 수재들만이 들어가던 청주사범에 25대 1의 경쟁을 뚫고 입학하지만 2학년 때 집이 가까운 대전사범으로 옮겨가 졸업을 한다. 6,25가 터지자 1952년 사병으로 입대해 간부후보생으로 임관한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1960년 육군대위로 전역한다. 지금도 그의 몸에는 당시 제거하지 못한 파편이 일곱 군데나 박혀있을 만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그는 1960년 4,19 뒤 7,29 총선에서 5대 민의원에 출마하나 민주당 거물 신각휴후보에게 패배한다. 이어 치러진 충북도의원선거에 도전해 당선되나 5,16쿠데타로 의원직을 잃는다. 이후 6, 7, 8대 국회에 연거푸 출마를 감행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처남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육인수후보에게 잇달아 고배를 마신다.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뺨치는 관권, 금권선거에 온갖 불법, 탈법이 횡행하던 분위기에서 당선이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가 국회에 첫 입성한 것은 1973년의 제9대 국회의원선거다. 1구 1인의 선거법이 1구2인으로 개정이 돼 육인수후보와 동반 당선된 것이다. 4번 낙선하고 5번째 당선이 되었으니 4전5기(四顚五起)인 셈이다.

이후 10대, 12대에 당선되지만 13대 낙선이후 보궐선거, 도지사 선거, 15대, 16대 등 5차례 낙선을 거듭하고 2004년 17대 국회에 입성함으로써 끊질 긴 ‘정치인생’의 꽃을 피운다.

와신상담(臥薪嘗膽), 그가 16년 공백 끝에 다시 국회에 들어가자 정가에서는 부도옹(不倒翁) 등소평에 버금가는 ‘인간승리’라고 찬사가 쏟아진다. 그의 나이 73세, 여야의원 중 최 연장이었다.

그의 반세기 정치역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암울하던 군사 독재시절 거의 야당으로 일관한 그에게 가해진 숱한 압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1973년 첫 번째 당선되고 집이 없어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 여관에 묵고 있을 때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다시피 ‘남산’으로 끌려가 1개월을 고문을 당했던 일.

신군부가 득세하던 80년 봄 계엄사에 52일 동안이나 구금되어 조사를 받은 일. 또 감시와 견제 속에 모함과 중상을 못 피하고 억울하게 옥고를 치른 일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들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는 소신을 굽히거나 계보 한번 바꾸지 않고 일관되게 지조를 지켜왔다.

이부의장은 ‘신의’를 아주 중시하는 특별한 사람이다. 아니, 중시한다기보다 ‘신의가 인생자체’라고 말을 해야 옳을 듯 싶다. 그는 한번 인연이 되어 만난 사람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그의 주변에는 40년, 50년 된 친지들이 수두룩하다.

보좌진 역시 마찬가지다. 1964년 고등학교졸업생이던 김택현 보좌관은 오늘에 이르도록 이부의장을 떠나지 않고 있다. 홍안의 미소년이 60대가 되었으니 42년을 같이 해온 셈이다. 노덕산(57)보좌관 역시 첫 번째 당선된 9대 국회 때 인연을 맺어 오늘까지 그를 지켜주고 있다. 33년의 동고동락이다. 그들은 보좌관이라기 보다는 형제요, 가족이나 다름없다. 이부의장의 오늘이 있는 것은 그와 같은 변함없는 인간성과 신의에서 비롯된 것임은 물론이다.

이부의장은 선거에 패배해 불우한 처지에 있을 때도 늘 이들 보좌진과 고락을 함께 한다. 경제가 여의치 않은 원외시절임에도 여름 휴가철이면 어김없이 보좌진의 가족들과 피서를 떠나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함께 어울려 더위를 식히곤 한다. 이해와 필요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세속적인 인간관계에 비춰 볼 때 드문 ‘인간학’이다.

국회부의장이라는 자리가 그리 녹록한 자리는 아니다. 요즘은 자가용 넘버로 바뀌어 ‘1006’번이 되었지만 과거 관용차시절 국회부의장의 승용차번호는 ‘관5’번이었다. 대통령이 1번, 국회의장이 2번, 대법원장이 3번, 국무총리가 4번임을 감안한다면 국회부의장은 국가서열 5번인 셈이니 ‘보통자리’는 아니다. 지금 부의장의 승용차 넘버 역시 다섯 번째 순위에는 변함이 없다.

충북 출신으로 역대 국회부의장을 지낸 이는 3대국회 때 최순주(1954, 자유당, 영동)씨, 9대국회 때 이민우(1976, 신민당, 청주)씨, 16대국회 때 김종호(2000, 자민련, 괴산)씨에 이어 이부의장이 4번째다.

이부의장은 요즘도 70대 나이를 개의치 않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마다 한 시간씩 달리기로 노익장을 과시한다. 한번 한다면 하는 오기와 집념에다 체력마저 타고난 것이 오늘의 그가 있게 된 원동력이기도 하다.

신의와 집념의 정치인 이용희. 그가 원로정치인으로 한국 정치사는 물론 충북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정치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족으로는 평생을 헌신적으로 내조해온 부인 유정순여사(72)와 소년체전 충북7연패의 주역이었던 축구선수출신의 재형, TV탤런트인 재훈, 중견기업인인 재한씨 등 3형제와 출가한 두 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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