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목 모임 출발, 80년대 후반 운동권과 대립
전국 단위 극우 폭력조직과는 무관, 자생조직
93년 ‘총장실 농성’ 강제해산 사건 여론 뭇매

   
▲ 2005년 6월 화랑회 동문들이 모교에서 체육대회를 갖고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제공=화랑회>

충청리뷰가 단독 입수한 청주대 내부 문건 ‘제38대 총학생회장 선거 집중지원계획 보고’와 ‘학생대표 L.T결과 보고서’를 통해 청주대 미등록 학생동아리인 ‘화랑회’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등록금 문제와 관련해 ‘화랑회 소속이었던 총학생회장 A씨 보다 같은 학번이지만 모임 선배격인 대의원회의장 B씨에게 공을 들여야 한다’는 내용이 문건 안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B씨는 사실관계 가운데 일부를 부인하고 있지만 대의원회 사무실과 후생복지위 사무실에 대한 에어컨 설치와 취업보장 등에 대한 ‘흥정’이 오고간 사실이 보고서에 상세하게 기록이 돼있다.

대학 내 친목모임 수준인 화랑회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3년 5월 ‘총장실 점거’를 둘러싸고 운동권 학생들과 난투극을 벌이게 되면서부터다. 그러나 화랑회 멤버들은 당시 언론에 ‘운동권에 대한 테러’로 기록된 이 사건에 대해 ‘부풀려진 측면이 있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어찌됐든 화랑회가 창립 20년을 맞이하면서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스스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386’으로 대변할 수 있는 7080세대 운동권들에게 밀려들었던 이념적 혼란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다. 화랑회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집중 취재했다. / 편집자

화랑회의 전신은 1984년. 현재 모 기획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C씨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계’ 수준의 친목 모임인데, 고교재학 당시의 인연이 모임의 연결고리가 됐다.
화랑회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모임이 시작된 것은 1986년 봄이었다. 재수를 했거나 타 대학에 다녔던 선후배들이 86학번으로 입학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모임의 틀을 갖추게 됐다.

현재 화랑회의 기수는 24기에 이르는데, 대학의 학번 보다는 고교 졸업연도를 기준으로 기수가 매겨졌다. 그러나 결성 초기만해도 화랑회는 여전히 구성원들끼리만 알고지내는 친목 모임이었다. 기별 구성원도 대여섯 명 수준으로 선배가 후배를 추천하는 방식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실제로 화랑회 초기 멤버인 C씨는 “화랑회는 내가 알고있는 모든 모임 중에서 가장 좋은 모임이다. 지금도 선후배 사이에 존경과 사랑이 넘치고 사회봉사에 앞장섰던 학창시절의 추억이 살아숨쉬고 있다”고 회고했다.

전직 기자 D씨, 총학생회장 출마로 부각
친목 모임인 화랑회에 정치색이 덧칠된 것은 1988년 초 총학생회장 선거를 통해서다. 화랑회의 좌장 격으로 평가받고 있는 D씨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세력’으로 분류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청주대는 총학생회 부활과 함께 운동권 각 계파와 다양한 비운동권 세력이 이른바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훗날 지역 일간지 기자로 근무했던 D씨는 86학번이지만 서울 모 대학(82학번)을 다녔던 경력에다 통큰 성격 때문에 선거운동 초기 ‘99% 당선 확실’이라는 여론이 형성됐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는 현재 이시종 의원 보좌관을 맡고 있는 운동권 후보 백상진씨의 당선이었다.

1988년은 1987년 6월항쟁의 여파로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이 최고조를 이루던 시기였다. 학내 구성원 간에 이념갈등도 심했고 학생회 기구를 둘러싼 자리다툼도 만만치 않았다. 화랑회는 1980년대 말 총학생회 대신 총대의원회를 장악하게 되는데 지금까지도 총대의원회의장 자리를 대물림하고 있다.

자유수호, 호청련과는 비교도 하지 마라
화랑회 전·현직 구성원들이 가장 억울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1980년대 말 기승을 부렸던 과격 우익단체들과 유사단체로 평가받는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말기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기치로 내건 민주화운동이 분출되면서 자유총연맹이 결성된데 이어 1987년 이른바 ‘용팔이사건’을 주도한 조폭계의 전설 이승완(66)씨를 총재로 호국청년연합이라는 우익폭력조직이 결성된다. 전국 규모의 이들 조직은 일부 대학에도 뿌리를 내렸는데 ‘좌경척결’을 내세우며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테러를 일삼았다.

화랑회 중진인 E씨는 이에대해 복학해보니 “운동권들이 학교에서 맞고 있더라”며 “나는 오히려 대학 내에서 집회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학생회 간부들과 학내문제에 대해 공동보조를 취하는 등 충분한 교집합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E씨는 또 “화랑회 구성원 중에 극히 일부가 호청련 등에 가입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초창기 멤버들이 이같은 활동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모임 내에서 티를 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범죄와의 전쟁’을 계기로 호청련이 자진 해산되고 학생운동도 가파랐던 기울기가 차츰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운동권 총학생회와 대의원회를 장악한 화랑회가 양대 구조를 이루게 됐다는 것이다.

1993년 총장실 난입사건 ‘세간 주목’
화랑회가 학교를 벗어나 세상의 관심을 끈 것은 1993년 5월21일 이른바 총장실 난입사건을 통해서다. 1993년 5월21일 오후 7시30분쯤 총학생회 간부 등 운동권 학생 60명이 농성을 벌이고 있던 청주대 총장실에 화랑회를 주축으로 한 학생 20여명이 쇠파이프 등을 들고 난입해 운동권 학생들을 문밖으로 몰아내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던 여학생이 크게 다치는 등 2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화랑회 소속 학생들이 무더기로 사법처리되고 무엇보다도 대학내 폭력조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화랑회 학생들은 농성학생들에게 ‘총장퇴진을 위한 점거농성은 부당한 일’이라는 자술서를 쓰게 했는데, ‘학교측의 사주를 받고있다’는 가설이 굳어진 것도 이날 사건이 계기가 됐다.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 당시 화랑회 구성원들은 폭력사태는 불미스러운 일이었지만 사건이 과장, 증폭된 측면도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쇠파이프와 칼 등 둔기, 흉기를 미리 준비하지는 않았고, 당시 학생회 관계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간질을 해 서로 오해한 측면이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화랑회 중진 E씨는 운동권의 지원으로 당선됐던 단과대 학생회장 Q씨(현직 기자)가 “‘운동권들이 붙어보잔다.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었으며, 당시 87학번 이상 선배들은 총장실 난입을 강력히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E씨는 “화랑회 멤버들은 지금 사회 여러 분야에서 바쁘게 살고 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고 누구로부터도 매도당할 언행을 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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