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를 항해하던 큰배가 장애물에 부딪쳐 가라앉게 되면 가장 먼저 배를 떠나는 건 쥐들이라고 합니다. 쥐는 다른 동물이 갖고있지 않는 신비한 감각기능이 있어 배가 가라앉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약삭빠른 사람들을 가리킬 때 즐겨 쓰는 화두 입니다.
요즘 정치 판을 보면 머리가 어질어질합니다. 마치 가라앉는 배에서 쥐들이 탈출하는 어지러운 장면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선거가 눈앞으로 바짝 다가오면서 이회창후보 쪽으로 세(勢)가 기운 듯 하자 이 당 저당에서 ‘도망’나온 사람들이 한나라당 앞에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가 몸담았던 당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지만 당의 인기가 떨어져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자 미련 없이 새 안식처를 찾아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에게서 최소한의 염치도, 양심도, 신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뻔뻔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난날 선조 들은 인간행동의 절대가치를 지조와 절개에 두고 그것을 크나큰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어느 시대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의리를 저버리는 이들이 많았기에 그러한 지조와 절개를 최고의 가치로 쳤던 것입니다. ‘남자는 지조, 여자는 절개’라는 세간의 속담은 그것을 이르는 시대의 교훈 이였습니다. 추운 겨울 독야청청하는 낙락장송을 기림도, 봄여름 마다하고 낙목한천(落木寒天) 찬 서리에 피는 가을 국화를 예찬함도 그 지절(志節)을 찬미함입니다.
예나 이제나 왕조나 왕권 또는 정권교체기이거나 시국이 도전을 받을 때면 어김없이 출몰하는 것이 변절자들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충신열사도 나오지만 역적 매국노 변절자도 수 없이 등장합니다. 역사상 지절자와 변절자가 확실히 구분된 시기는 고려 패망을 전후해서입니다. 고려조의 패망은 선비들에게 새 왕조의 참여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냐의 선택을 강요했고 이 길이냐, 저 길이냐의 선택에 따라 영화와 멸문지화(滅門之禍)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변절자는 당대가 아니면 후세에라도 반드시 심판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조선왕조 500년, 그리고 일제 식민지시대를 거쳐 자유당, 민주당, 3공, 유신, 5·6공, 그리고 문민정권을 지나 오늘에 이르도록 이 땅의 변절자들은 참으로 끈질기게 그 맥을 이어 옵니다. 김대중정부 초기 ‘정국안정’이니 ‘지역발전’이니 하면서 여당으로 변신한 이들이 얼마였습니까. 그런데 이제 또 많은 이들이 구차한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변절의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딱합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짓은 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설령 다음선거에서 낙선될 것이 눈에 보인다 할지라도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이 당 저당을 옮겨 다니는 그런 부끄러운 짓은 하지 못합니다. 그게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들도 자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식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이 길이 옳은 길이기에 택했노라”고 할 것입니까. “아비가 너희들 잘 살게 하려고 양심을 판다”고 할 것입니까. 아니면 “지조란 구시대의 유물이라서 버려야 한다”고 할 것입니까. 궁금합니다. 자신은 비록 변절자가 된다해도 자식에게마저 그런 길을 가게 할 부모는 없을 터이기에 말입니다.
영악한 쥐들이 침몰하는 배에서 먼저 뛰어 내린다고 저들만 살지는 못합니다. 쥐들은 그 아래 검푸른 바다 가 있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가을밤하늘을 수놓으며 날아가는 기러기 행렬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이(利)를 좇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인간철새’들은 추악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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